난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싫은 사람이 시어머님이었다.
며느리를 시앗 보듯 하는 시어머님(아들 다섯 중에 둘째아들이 남편역할이었다) 앞에
난 늘 언제 물어뜯길지 모르는 굶주린 고양이 앞의 생쥐였었다.
하는 일마다 생트집을 잡으시고 저주를 퍼부으셨다.
임신한 며느리에게 명절에 친척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난 너를 그렇게밖에 못 가르쳐서 보낸 니 친정엄마가 원망스럽다."
난 아무말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며칠을 울었다.
형님은 시어머님께 말대꾸 하다가 따귀도 맞았다길래 아무리 억울해도 변명조차 못하고 살았었다.
내가 별 반응을 안 보이자 친정집 전화번호를 대라고 하셨다.
엄마에게 불똥이 튈 것이 뻔했지만 거역할 수 없어서 번호를 알려 드렸다.
일주일 후 동생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언니, 임신중이고 충격 받을까봐 그리고 엄마가 절대로 비밀로 하라고 해서 참고 있었는데...
언니네 시어머님께서 엄마한테 전화 걸어 언니 흉을 한시간도 넘게 봤대.
엄마는 도저히 못 참겠어서 '도로 보내세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걸 참으셨대.
언니 가난한 집에 시집가서 몸고생만 하고 사는 줄 알았는데 마음고생까지 겹쳐서 사는구나 싶은 엄마는
전화를 끊고 하루종일 우셨대."
그 소리를 들은 후 진통이 시작되었다.
넉달 반밖에 안 된 아이가 뱃속에서 용트림을 하는데 죽을 듯이 아팠다.
아는 언니가 간호과장으로 있는 백병원에 입원을 하고 일주일을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하혈과 고통이 너무 심해 아이를 포기하기로 했다.
진정제를 끊자 태아는 살아서 나왔다.
영안실로 보내는 서류를 동생이 보니 남아로 써 있더란다.
11월 19일 밤이었다.
그렇게 보낸 태아를 119라는 숫자로 연상하기로 했다.
그 일로 남편과 헤어질까도 생각했지만 이미 태어난 큰애를 위해 더 견뎌보기로 했다.
얼마 후 시어머님 생신이라 몸도 제대로 못 추스리고 시댁에 갔더니
"넌 애 키울 주제도 못 되는데 차라리 잘 되었다. 하나로 끝내!"
나도 더이상 아이 낳아 고통에 동참시키고 싶지 않아 그럴 결심이었다.
문제는 그 말씀을 하시고 바로 네째동서에게는
"넌 애 잘 키우니까 열도 괜찮다. 낳을 수 있는한 낳아 키우거라."
그 후로도 몇년은 더 시어머님의 미움을 고스란히 받으며 환청까지 들으며 지냈다.
아무리 괴롭혀도 꿋꿋하게 사니까 강도가 점점 약해져갔고
외롭게 지내는 큰애를 위해 둘째도 낳았다.
둘째가 태어난 후 서서히 시어머님의 구박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별걸 다 기억하는 기억력으로 내 아픈 기억들이 고스란히 내재해 있었지만
난 두 아이들을 위해 두 아이들의 아빠를 위해 그렇게 싫은 시어머님께 진정으로 내 할 도리를 했다.
몇년 전부터는 시어머님을 뵈어도 울렁증도 없을 정도로 관계개선이 되었다.
내게 퍼붓던 화살이 다시 철없는 형님에게로 향해져서
밥상이 엎어지고 컵이나 냄비들이 날아 박살이 나고 찌그러지곤 했지만
형님은 눈도 깜짝 않고 같은 잘못을 수시로 하면서 함께 살고 있다.
기 싸움에서 어머님이 지셨다. 속을 끓이다 못해 뇌경색으로 오른쪽 마비가 왔다.
병원에 입원하시자 서울 사는 며느리 셋이 교대로 밤샘 간병을 했다.
퇴원 후 어머님 댁으로 가시면 다시 영양실조로 쓰러지실 것 같아 우리집으로 모시기로 했다.
착한 막내동서가 전업주부인 자기가 모시는 게 낫다면서 모시더라도 자기가 먼저 모시겠다고 했다.
형님은 "어머님 저 상태로 집에 오시면 안 되니 완치 되시면 오시게 하라." 했다.
퇴원 후 막내네와 우리집에 계시던 어머님께서 기어코 어머님 댁으로 가셨다.
가신다고 모시러 오라고 아침결에 얘기를 했건만 저녁까지 잡숫고 가셨는데
그 때까지 형님은 어머님 방에 연탄불도 안 넣어 놓아 냉방이더란다.
된장을 담그시고 다시 우리집으로 오셨다.
성격상 다시 오실 분이 아니신데 집이 너무 추운데다 어머님께서 손수 연탄불까지 가셨단다.
드시는 것도 변변찮은 데다 속도 많이 끓이시고 새벽녘에 곯아 떨어진 며느리방 연탄불까지 갈러 다니시다
뇌경색이 드신 터라 겁이 나셨던 모양이다.
어머님께서는 날이 풀리자 어머님 댁으로 다시 가셨다.
형님은 어머님이 밥상 정도는 운동삼아 차려 드셔야 한다고 밥상도 안 차려 드린단다.
심지어 내가 해다 놓은 반찬도 안 챙겨드린다.
며칠 뒤 문안 갔다가 먼저 싸 갔던 반찬들은 도로 가지고 왔다.
냉장고 구석에 처박힌 채 나도 간신히 찾아내었으니 어머님께서 무슨 수로 그 반찬들을 드셨겠는가.
내가 끓여간 사골만 덩그러니 가스불 위에 올려져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곰국을 드시는데 파도 없이 드시다 침 맞으러 다녀오시는 길에 파한단을 어머님께서 사셨단다.
형님은 집에서 밥을 거의 안 먹으므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다.
직접 당하지 않는 우리도 화가 치미고 기가 막힐 지경인데
시어머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
제발 식사 좀 제대로 하시라 말씀 드려도
"이 병에는 살찌면 큰일이다." 그러시면서 하루 두끼 허기만 겨우 면하고 사시는 중이다.
제발 다시 우리집으로 오시라 해도 이제는 안 오시겠단다.
어머님 집에서 줄곧 사셔야 형님 내외가 어머님을 짐짝 취급 안 할 거라고...
난 이따금 시어머님과 식사도 같이 하고 곁에서 잠도 자고 하느라 시댁에 드나든다.
오고가고 세시간도 더 걸리는 거리지만 외로움에 생을 포기하실까봐서다.
서슬 퍼렇던 시어머님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