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명절은 연휴기간이 별나게 짧아서 제사음식 주문이 더 많았다.
연휴가 길면 집에서 음식장만을 하기도 하지만 짧으면 간단히 사서 지내기 때문이다.
장사를 끝내 하지도 못하고 시댁에 가기 위해 음식을 한보따리 싸서 애들아빠 차에 올랐다.
그 때부터 험악한 분위기가 벌어졌다.
예약된 음식만 해주고 일찌감치 가게 닫고 시댁에 갔어야 했다는 거다.
결국 올 추석부터는 네시까지만 장사하고 마치겠다고 하고 분위기를 바꿨다.
며느리가 다섯인 우리 시댁은 명절 이틀 전부터 모여 사흘을 같이 자면서 음식을 장만한다.
전에는 한두명이 그 음식을 장만하느라 한밤중까지 쉴 틈도 없었지만
며느리들은 늘어만 가는데 음식은 갈수록 줄여가서 이제는 오후가 조금 지나면 할일도 없다.
부침개도 어찌나 조금하는지 반찬으로 놓을 것조차 없을 정도다.
반찬가게를 하는 나는 명절전날 같이 일을 못하는 죄인으로서
부침개며 갖가지 색다른 반찬을 한보따리 챙겨 가곤 한다.
내가 도착해야 밥상도 거창해지고 술상도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나름대로 저녁상 차리기 전에 도착하고자 애를 쓰지만 늦을 때도 있다.
이번에도 다들 저녁상을 물린 후에 도착한 고로 우리 식구만 따로 저녁식사를 했다.
난 가는 도중에 애들아빠한테 하도 욕을 먹어서 밥 먹으면 체할 것 같아 안 먹었다.
우리 식구들이 밥을 먹는 중에 동서들에게 미리 준비해간 옷들을 고르라 했다.
같이 일 못한 죄인으로, 명절이니까 무엇이라도 나누고 싶어서 준비한 옷이었다.
다들 취향에 맞게 하나씩 골라서 그자리에서 입고 앉았다.
우리 애들이 이번에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 고로
네째동서에게서는 큰애 교복값과 작은애 가방과 학용품을 받았고
막내동서에게서는 큰애 가방과 작은애 옷을 선물받았다.
형님네 큰아들이 중학교 들어갔을 때 이십만원, 고등학교 들어갔을 때 오십만원 축하금으로 준 적이 있었지만 형님 성격을 아는 지라 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세째 뺀질이도 물론 아무것도 없다.
명절이면 애들 옷사주는 게 낙인 나는 세째네 세아이 몫도 꼭 챙기는 편인데
형님이나 세째동서는 받을 줄만 알지 주는 것에는 상당히 인색하다.
거의 안면몰수하고 사는 편이다.
형님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던지 내가 명절이라 드린 십만원에서 오만원을 꺼내 내민다.
"에구 난 중학교 가는 줄도 몰랐네."
세째동서는 "형님, 전 아무것도 준비 못했어요." 역시 입으로 떼우고 만다.
형편은 우리 보다 낫고 자기 아이들 셋은 미취학아동임에도 학습지를 몇개씩이나 시키고 고급으로 입히고 먹이고 잘 살고 있는 중이다.
난 속으로 '그래 니들끼리라도 잘 살어.' 그러고 만다.
그래도 그 아이들 진학시에 나까지 입으로 떼울 수는 없지만...
명절에 시댁에 가면 설겆이는 도맡아 하게 된다.
새벽부터 시댁에 도착하는 시각까지 꼬박 서서 고생한 나지만 어쩔 수 없다.
구정날 저녁설겆이까지 마치고 우리는 경북 봉화로 향했다.
가기 직전 설사와 구토를 하여 위태위태했지만 친정동생들이 이미 다 모였을 것이므로
강행군을 했다.
친정집에 가자마자 그 때부터 장작불 때는 방에 드러누워 끼니도 거르고 잠만 잤다.
친정엄마는 작은종가 맏며느리답게 음식장만도 푸근하여 먹을 게 풍성했지만 내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자도자도 잠은 또 왔다.
그 와중에 친척들 댁에 세배 드리고 종가에 가서는 유물관 구경까지 했다.
애들아빠는 장작을 패고 애들은 산으로 들로 이리뛰고 저리뛰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동생들은 봄방학이라 하루 더 있다 온다고 남고
애들아빠도 월차를 낸 상태이므로 아이들과 남고
동생신랑과 조카 한녀석과 난 밤 열시에 서울로 행했다.
세시간만에 집에 도착했다.
동서들은 갈 친정이 없어서 아님 그 다음날 가도 되므로 다들 하룻밤 시댁에서 더 머무는데
우리 식구만 빠져나온 게 영 마음에 걸린다.
아마 추석에는 친정나들이를 못하지 싶다.
부당함을 느끼지만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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