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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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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촌 할머니


BY 그린플라워 2006-09-07

6촌 할머니

전날 하루종일 세가지나 되는 행사에 애들까지 동원하여 참석하고

밤 열한시가 다 되어 집에 와서 한시가 넘도록 과제물 쓰고 하느라

일요일 아침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는데

대구에 사는 네째동서가 전화를 하는 바람에 잠이 깼다.

"어쩐 일이냐? 애들은 잘 있냐. 난 요즘 혼빠지게 사는 중이다...."

한참 떠들고 있는데

"형님 지금 일어나셨으면 미역국도 못 드셨겠네요." 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내 생일이구나..........



남편은 시어머님 볼일 봐드리러 시댁에 간 고로

사골국물 남은 것에 밥을 말아 셋이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집을 나섰다.

4호선과 2호선, 5호선까지 갈아타니 어디를 가는데 이렇게 멀리 가냐고

큰애가 묻는다.

"냉면 먹으러 가는 거야." 하니

"냉면이야 집에서 만들어 먹으면 되지 이렇게 멀리까지 와요?" 한다.

면사랑에 소개했던 맛집 '가야밀면' 으로 가서 밀면 두그릇을 시켰다.

애들 먹성을 고려하여 하나는 곱배기를 시킬까도 생각했지만

아침 먹은지도 얼마 안되고 해서 보통을 주문했더니

애 둘이 나보다 더 먹었는데도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더 먹을 수 없냐는 것이었다.

담에는 더 많이 사준다고 약속을 하고 다시 목동역으로 갔는데

갑자기 작년 가을에 혼자되신 6촌할머니 생각이 났다.



방화역 근처 아파트에 사시니 여기까지 와서 안 찾아뵙는 건 도리가 아니다 싶어 전화를 했다.

멀쩡히 되던 전화번호였는데 연결이 안 되었다.

사시는 곳을 아는지라 허탕치더라도 가보기로 했다.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이웃집 할머니 한분과 화투패를 떼고 계시는 중이셨다.

반색을 하시는 할머니를 뵈니 역시 오기를 잘했다 싶었다.

할머니 계심을 확인하고 다시 나와서 녹차베지밀 한박스와 딸기 한상자를 샀다.

네시밖에 안 되었는데 저녁을 먹고 가라시면서 밥을 앉히셨다.

한끼라도 손수 해먹이실 요량으로 마음이 급하신 게다.



애들은 놀이터로 가고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서른 여덟살에 장성한 아들 둘 있는 할아버지께 재취자리로 오셔서

사십년이 넘도록 참으로 정갈하게 잘 사신 분이시다.

첫결혼에서 자식을 못 낳아 소박을 맞았다는데 재혼 후에도 자식을 못 두셨다.

할아버지와는 띠동갑으로 12년차이가 나셨는데

삼년 전에 중풍으로 쓰러지신 할아버지 수발을 그야말로 지극정성으로 하신 분이시다.

아들 둘 다 크게 성공하여 강남에서 빠지지 않는 재력가들인데

할머니 할아버지 생활비를 두집에서 십오만원씩 삼십만원을 드렸다는데...

삼년 전에 사시던 잠실 아파트 13평짜리를 일억삼천만원에 처분하고

지금 사시는 18평 아파트를 육천오백만원에 구입하시자

그나마 생활비 받으시던 건 중단이 되었단다.



남은 돈으로 여생을 사시려고 했는데

큰아들 내외가 자신들이 그 아파트 살 때 삼십만원 보탰던 권리를 주장하면서

육천만원을 강탈해 갔다고 한다.

지금은 통장에 남아있는 돈으로 근근히 생활해 가시지만

그 돈이 떨어지면 사시는 아파트를 줄여서 사시는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할머니 명의로 된 아파트가 있고 재산 많은 아들이 둘이나 있는 상태라

생활보호대상자에서 조차 제외된 상태라 하셨다.

아무리 양할머니지만 손주들이나 손녀들에게서는 전화 한통 없다고 하신다.



우리 자매들은 할머니 회갑 때 반지도 해드리고

이따금 안부전화도 드리고 어쩌다 한번씩 찾아뵙곤 하는데

할머니는 그것조차 너무나 고마워하신다.

할머니 화장대를 보니 거의 다 비어있는 상태였다.

78세시지만 아직도 고우신 할머니를 위해

가는 길에 내가 바르려고 산 화운데이션과 오리리카바마크를 드렸다.

너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파와서

핸드백을 열고 조금밖에 쓰지 않은 립스틱마저 드렸다.

마침 립스틱이 다 떨어져서 사려던 참이셨단다.



식사 후 설겆이를 하면서 낡아빠진 수세미조차도 가슴을 짜안하게 했다.

우리가 멀어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시던 할머니모습이 생각나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다음번에 갈 때는 할머니께 꼭 필요한 이것저것을 미리 꼼꼼히 챙겨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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