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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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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초를 다투게 하는 손님들


BY 그린플라워 2006-08-30

월요일과 금요일이 바쁜 날이고 어제 열심히 만들어 놓은 반찬이 즐비했으므로

오늘은 조금 여유있게 일해도 되리라 여겼었다.

'나한테 무슨 그런 복이 있으랴~~'

 

"나물 좀 살 수 있나요?"

88사이즈는 됨직한 예쁜 아가씨가 삼십인분의 비빔밥 재료를 사겠단다.

"오늘 저녁에 먹을 건데요. 고사리와 도라지 대신에 무볶음하구요, 콩나물은 많이 있음 좋겠어요. 취나물도 주시구요."

"사만원어치쯤 하셔야겠네요."

"제가 직접 만드려고 했는데 덥기도 하고 일도 많을 것 같고 해서요. 삼만원 예상하고 왔는데 삼만원에 안 되나요?"

급하게 주문하는 데다 가격까지 헐값이네... 아가씨라 요즘 시세에도 어둡구먼. ㅠ.ㅠ

"직접 사서 만드셔도 그 가격에는 못 만들어요. 삼만오천원에 해 드릴께요."

"좋아요. 근데 배달 안 되나요?"

우와~ 완전히 설상가상이다.

마침 애들아빠가 다섯시까지 집에 있는 날이라 배달해주겠다고 했다.

그런 경우에는 배달료를 받아내라고 동생이 신신당부했지만 마음 약한 난 입이 안 떨어진다.

 

일단 콩나물 4킬로 한박스를 두번에 나눠 삶아 무쳤다.

커다란 무도 두개 채 썰어 볶아내고.

취나물 반박스를 다듬어 데쳐내어 볶았다.

고사리 대신 가지나물을 할까 하다가 일단 동의를 구해야 할 것 같아 전화를 했더니

고사리로 그냥 해달란다.

우리집 가지볶음이 얼마나 인기가 좋은지 모르는 손님이니 할 수 없다.

그냥 고사리를 볶아 준비한다.

덕분에 세시가 넘도록 난 점심밥도 못 먹었다.

아침밥도 먹는둥 마는둥하고 나왔는데...

배달을 보내고 나니 사방에 밀린 일 투성이다.

브로컬리 데쳐내어 느타리버섯과 볶기, 두부조림, 불고기 재우기...

 

우리 일이 미리 예약해도 될까말까한 일인데 이따금 이렇게 느닷없이 치고들어오는 주문은 참으로 황당하다.

야멸차게 거절도 못하고...

그렇다고 급행료를 받아낼 수도 없고.

 

오늘 만들어팔고자 했던 자반고등어조림은 결국 가게를 나오는 순간까지 붙잡고 있어야 했다.

결국 내일 팔아야하게 된 것이다.

 

음식은 쫒기듯 만들면 반드시 사단이 난다.

애인에게 먹일 것처럼 집중해서 갖은 정성을 다 기울여야 할 음식을

정신나간 여자 널뛰기 하듯 해치워야 하는 건 참을 수가 없다.

불고기 재우는 것처럼 계량저울로 하는 일조차 정성이 덜 들어가면 맛의 차이가 나는데

적당량을 넣어가며 하는 나물들은 서두르다 보면 똑 떨어지게 맛있는 맛이 안 되곤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나마 덜 바쁜 날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래도 사고는 났다.

주문 받자마자 쌍동이칼을 쌍동이칼갈이에 넣어 비수처럼 갈아놓았는데

설겆이하다가 치운다고 건드린 게 미끄러지면서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 스쳤다.

지혈을 시키면서 서랍을 여니 방수밴드가 빈통만 덩그러니 있다.

일층에 있는 약국으로 뛰는 수밖에.

손톱 바로 밑이 베인 거라 밴드를 붙여도 소용이 별로 없었다.

평소에 끼지 않는 고무장갑을 찾으니 하필이면 왼쪽밖에 안 남아 있다.

참 여러가지로 속 썩이네.

고무장갑 사러갈 시간도 아까워 그냥 물 묻혀가며 했다.

이내 스며드는 물 때문에 밴드는 수시로 갈아 붙여가며 어쨋든 납품은 제시간에 했다.

 

우리 단골손님들은 내가 얼마나 청승에 가깝게 음식에 정성을 들이는지 아는 지라

예약할 일이 있으면 보름 전쯤부터 언질을 준다.

문제는 생면부지의 손님들이다.

대략 소개로 온 이들인데, 내가 요술방망이로 음식을 만드는 줄 아는가 보다.

다시는 급한 주문 안 받아야지... 하면서도 늘 닥치면 거절도 못하고 동동거리게 된다.

 

가게 게시판에 '급한 주문은 절대 못해드립니다' 라고 써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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