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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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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지


BY 그린플라워 2006-08-27

묵은지(잘 삭은 김장김치)의 용도는 참으로 다양하다.

생선조림에 넣으면 생선보다 더 맛있고, 간장에 잰 돼지고기와 함께 볶아먹으면 환상적이다.

입맛 없을 때 묵은지 한접시면 밥한그릇이 게눈 없어지듯 없어진다.

두부김치를 해 먹어도 맛있고, 콩나물국 남은 것에 조금 썰어 넣고 김치콩나물국을 끓여먹거나, 김치콩나물국밥을 해 먹거나, 도토리묵밥에 고명으로 얹어도 맛있다.

 

지금 우리집에는 묵은지가 30킬로쯤 있다.

최대형 김치냉장고의 김치통으로 세통 가까이 남아 있으니...

 

시어머님께서는 서울 근교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사시는데

성품이 얼마나 깐깐하고 야무지신지 엄청나게 많은 농사를 지으시면서도 거의 유기농재배를 하신다. 봄이면 계분을 트럭으로 사다 부으시고 일일이 벌레를 잡으시고 잡초를 제거하신다.

 

신혼 초에 열무김치를 담는데 도우러 오라고 하셨다.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갔는데

아침 열시부터 열무를 다듬기 시작하여 오후 여섯시까지 점심도 대충 먹고 계속 다듬었다.

대형 고무통으로 네통을 절였으니...

자정 무렵에야 가까스로 열무김치가 완성이 되었다.

그걸 시작으로 해마다 김장을 삼백포기도 넘게 하신다.

반찬가게를 하기 전에는 그 엄청난 김장을 어슬렁거리기만 하는 형님과 어머님, 셋이 전담해서 담궜다.

그야말로 김치 공장이 따로 없었으며 이틀을 꼬박 김치속 넣는 일로 보내야 했다.

아들 다섯을 다 혼사를 시키신 어머님은 이제는 사백여포기쯤 담그신다.

재작년에는 하루 틈을 내어 내몫만큼은 내 손으로 속을 넣어 왔는데

작년에는 너무 바빴으므로 완성된 김치가 왔다.

여덟개의 김치냉장고통에 가득채우고 '이걸 언제 다 먹노?' 했었는데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집에서만 먹던 김치를 야금야금 가게에 파는 반찬에 적용을 했더니 인기가 짱이다.

부대찌개에도 묵은지를 썰어서 봉지에 넣어 끓여먹게끔 해서 파는데 잘 익고 칼칼한 김치맛 덕분에 부대찌개의 인기는 날로 상승 중이다.

김치콩나물국도 잘 팔리고 묵은지제육복음도 인기가 좋다.

 

어머님께서 살아계시니 이런 횡재를 하지...

반찬가게 하는 며느리 도우신다고 메주콩도 많이 심으시고 간장, 된장도 엄청나게 담그신다.

가을이면 가지, 토련대, 고춧잎, 무말랭이 등을 말려주시고, 여름에 말린 고구마줄기도 챙겨주신다. 물론 시래기말린 것까지도...

우리 가게 보름나물이 맛있는 이유는 시어머님의 정성 덕분이다.

 

뭐든 주시면 넘치게 주시는데...

미워하심도 소설글감이 될 만큼 하셔서

결혼 후 육년이 넘도록 난 바늘방석에 앉아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연애결혼으로 아들을 훔쳐간 것도 아니었는데(소개 받고 두달도 못 되어 결혼함)

아들 다섯 중에 유독 둘째아들이 남편 대용일 게 뭐람.

며느리를 괴롭히다 며느리가 그래도 견뎌내자 친정에 전화를 해서 친정엄마께 내 욕을

한시간이나 하셨단다.

친정엄마가 "도로 보내세요." 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고

전화를 끊으시고 하루종일 우셨단다.

몸고생만 하고 사는 줄 알았던 딸이 마음고생까지 하는 걸 아시고는...

그 연고로 사개월 반만에 둘째아이가 유산되었다.

유산 후 어머님 생신에 죽지 못해 참석한 며느리에게 대 놓고

"넌 애 키울 주제도 못 되니 차라리 잘된 일이다. 하나로 끝내라."

거기까지는 내가 복이 없어서 이 수모를 겪는 거니 참을 만 했는데...

딸처럼 예뻐하시던 네째며느리에게

"넌 애 잘 키우니까 열도 괜찮다. 힘 닿는 데까지 낳거라."

치매가 걸리기 전에는 못 잊을 한맺힌 대목이다.

 

그래도 마흔넷에 둘째 아이 낳았다.

둘째아이 낳은 후로는 어머님의 모진 말씀도 손톱 밑의 가시처럼 여기시던 눈초리도 거두셨다.

지금은 어머님과 한방에 드러누워 별얘기를 다 하고 애들아빠 흉도 같이 본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가장 큰 복수는 용서'란다.

악을 선으로 갚다 보니 좋은 세월이 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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