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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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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추억-두번째


BY 그린플라워 2006-08-26

지독히 내성적이었던 나는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앞집 친구와도 어울리질 못했다.

동생들이 그 아이와 놀면 먼 발치에서 들킬새라

숨어 엿보곤 했다.

친구들이 찾아와 마당에서 놀 때도 방안에 틀어박혀

거울만 상대할 정도였으니...

삭막한 도시에서의 그런 생활은

방학마다 내려가는 외가가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외할아버지께서 대구 수도산 배수지 관리를 맡으셔서

30만평이나 되는 울타리 안에 있는 관사에서 사셨는데,

그 곳은 적산가옥(일본인들이 살다가 나간 집)으로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집이었다.

집 내부에 욕실도 있어서

쇠로 만든 깊은 욕조에 불을 지피면

그 속에 들어가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할 수도 있었다.



드넓은 울타리안(작은 동산이었다.)에는

온갖 나무와 풀과 열매들이 지천으로 있어서,

여름에는 떨어진 땡감을 양지바른 곳에

대자리를 펴고 며칠 얹어두면 어느새 홍시가 되어 있곤 했다.

산딸기 덤불은 소꿉놀이에 없어서는 안 될

먹거리를 제공해 주었고

할머니께서 심으신 오이와 토마토, 각종 채소들도

부재료로 이용되곤 했다.


외삼촌께서 출근하시며 주신 지전 5원은

하루에 쓰기에는 벅찬 돈이기도 했다.

작은 포도 한송이-1원, 사과 두 개-1원, 사탕 한 웅큼-1원,

과자한봉지-1원 했으니 말이다.



대구역에 내리면 꼭 택시를 타고 들어갔다.

택시 기본요금이 6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관사가 가까운 거리인지 그 요금이 워낙 비쌌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기본요금이면 배수지의 너른 울타리를 통과해

할아버지댁 마당에까지 데려다 주곤 했다.



저학년 때는 아버지께서 데려다 주시고 먼저 가시고

상경 때는 이모들이 동행하기도 했는데

고학년이 되자 서울역에서 기차를 태워주시면

대구역에 외삼촌께서 마중을 나오시다가

나중에는 혼자 내려서 택시를 타고 가기도 했다.

(그 때는 유괴범도 없었나보다.)



그곳에서도 어쩌다 큰맘 먹고 관사 울타리를 벗어나

배수지 정문도 통과해 과자나 과일을 사러 나가 보기도 했는데,

오가는 길에 만나는 아이들이 내 차림새-

(그 시절에는 기성복이 좋은 게 없어서 명동 양품점에서 파는

수입옷 아니면 엄마 따라 가서 양장점에서 맞춰 입거나

집에서 손수 만들어주신 옷을 입었었다.)

-징 달린 뾰족구두에 흰 양말, 원피스 입은 모양새를 보고

도시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내게 말을 걸어왔다가 내 말씨를 보고 그랬는지--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좋은 고래고기'-- 하며

합창을 하면서 따라다녀 기겁을 했던 적도 있다.



그 곳은 혼자 놀아도 얼마든지 외롭지 않았다.

오솔길을 산책하거나 상수리나무 숲속에 앉아 책을 읽곤 했는데,

더러 몰래 들어와 데이트하던 남녀가 외할아버지의 불호령에

놀라 달아나는 것도 보면서

그 아름다운 환경이 주는 혜택을 듬뿍 누리곤 했다.



오늘날 내가 쓰고자 하는 것들을

수월하게 서술할 수 있는 것도

그 시절부터 시작된 독서 덕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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