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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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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작은폭포


BY 원두커피 2006-09-14

등이 차가워 오기 시작한다.

또 그자리에서 그대로 잠든 모양이다.

일어서려는데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좀 더 누워 있을지 그만 일어날지를 잠시 고민하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머리가 몽롱하니 개운치가 않다.

그남자생각이 많은 날에는 항상 그랬다.

미련이 많이 남아서 였을까?

달력부터 본다.

오늘이 섬밖으로 나가는 날이다.

겨울로 가는 문턱에 있는 날씨치고는 무척이나 따뜻하고 포근했다.

방문을 열자 선이가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다가 나를 쳐다보며 배시시 웃는다.

섬 밖으로 나가는 날이라는걸 안 모양이다.

멀뚱히 그아이를 쳐다보다가 이내 포기하고 그아이를 데리고 가기로 맘먹는다.

9시쯤 배가 들어오기 때문에 서둘렀다.

선이의 손을 잡고 잰골음으로 선착장으로 향하다 아이의 집에다 얘기를

해야된다 싶어서 뒤를 돌아 보았다.

저 뒤에서 아이의 엄마가 잘갔다 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나만 몰랐을 뿐 아이와 엄마는 아까부터 손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아무 약속도 없이 그남자를 만나러 간다.

그냥 예전에 잘 갔던 곳을 다닌다.

두세곳 들리다 보면 하루가 간다.

마음이 따뜻해지면 그날로 돌아오지만 마음이 씁쓸해지면 하루 더 있다 오게 된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가지고 싶어서 였는지도 모른다.

따라나선 아이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않고 손을 이끌면 이끄는 대로 잘 따라다닌다.

응석도 부리지 않는다.

섬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꼭 대형마트에 들러 이것저것을 산다.

아이는 그것을 제일 좋아한다.

 

그남자의 슬픈전화는 그 뒤로 오지 않았다.

그전화로 인해 섬밖으로 나가기 시작한지도 9개월째로 접어들었다.

가끔 아주 가끔 옛친구들의 소식이 들린다.

좋은소리든 안좋은 소리든 듣다보면 그날 하루는 만가지의 잡다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진다.

다행스러운건 이불을 푹 뒤집어쓴채 하루를 지나고 나면 복잡해진

머리가 말끔해 지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혼자 고민하고 외로워하고 고통스러워 하면서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여느때와 같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괜히 심란해져서 혼자 앓다가

새벽무렵 바닷가 등대옆 바위에서 멍청하게 앉아있었다.

새벽바다의 짠내음은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그런 묘한 기분때문에 난 새벽잠을 물리치고 새벽바다에 끌려 나오는지도 모른다.

멀리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듯 하다.

이새벽에 누군지....

그럼그렇지 그여자였다.

세딸들의 엄마인 그여자 말고는 나를 새벽부터 부를 사람이 없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또 여기 와있네. 전화오던데...."

숨차하면서 토해낸 말이었다.

멀뚱히 쳐다보는 나에게 그여자는

"일부러 안받았어. 여러번 울리길래 또 올것 같아서 데리러왔지. 그만가자".

내팔을 잡고서 그여자는 얼른 가기를 청했기에 나는 아무말 없이 일어났다.

그여자는 잰걸음으로 나를 끌었고 나는 터벅터벅 걸었다.

그여자는 힘들어했다.

나를 파란대문으로 밀어넣은 그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그여자의 집으로 갔다.

새벽이어서 전화소리가 들렸나보다.

전화기옆에 한찬을 붙어 앉아 있으니 역시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잠이 덜 깬듯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잘지내니?"

밝은 목소리의 여자였다.

나보다 한살이 많았지만 친구처럼 지냈다.

"어....반갑네. 너도 ... 잘지내지?"

간단한 안부인사가 전화선을 왔다갔다 한다.

그여자는 다음달에 결혼한다고 했다.

결혼하기전 친구들을 보고싶다고 동창회겸 모였으면 한다고 했다.

새벽부터 전화한건 자기가 바빠서 그나마 제일 한가한 시간에 전화한 것이라고 했다.

기분이 갑자기 떨떠름 했다.

알았다고 하곤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약속장소르 얘기하지 않았다.

내심 다행이다 싶었는데 이내 전화벨이 울렸다.

그 여자였다.

"작은폭포"

꼭 작은폭포여야 했을까?

정말 가기 싫은 장소를 선택한 그 여자가 미워졌다.

하긴 왠만하면 꼭한번씩은 가본 낯익은 곳이어야 찾기도 쉽고 그랬겠지만

나에게는 가물거리는 그남자의 흔적이 가장 많이 묻어 있는 곳이었기에 싫었다.

 

그남자와 나는 딴세상을 접하기 전까지 술자리르 만들지 않으면 작은폭포에서

반나절을 지냈다.

거의 매일을

그카페의 주인은 우리를 기억하고는 잘해주려고 애썼다.

그카페 주인은 우리에게 한번도 싸우는걸 본적이 없다며 좋아 보인다고 했다.

우리는 그말을 듣기 좋아라 했다.

그남자는 갈리아노 스트레이트를 즐겨 마셨고 나는 민트를 마셨다.

달콤하면서도 부드럽고 강렬한 맛이 좋다고 했다.

나는 시원함이 좋았다.

보기에도 먹기에도

그카페에서 우리는 많은 얘기를 해서 서로를 이해했다.

작은폭포는 행복한 장소였다.

나에게는

 

가야하나 말아야하나를 두고 사흘밤낮을 고민했다.

하지만 내가 가지않았을 경우 모인 친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것이 겁이났다.

마음을 가다듬고 가기로 결정한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짓는법을 연습하기로 했다.

작은폭포에 가는날 아침에도 선아는 우리집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저아이를 어떻게 떼어놓고 가나 잠시 고민하는사이 세딸들의 엄마가 선아를 찾았다.

파란대문을 삐긋이 열어보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이자 선아를 들쳐업고 부랴부랴 파란대문을 나갔다.

선아가 손짓발짓으로만 떼를쓸뿐 아무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모습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따라 뭍으로 나가는 배는 너무 빠른것 같았다.

바람을 느낄 겨를도 없이 나는 뭍으로 나와 있었다.

사람들의 소리가 귓가에서 자꾸만 앵앵거린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다행히 작은폭포는 멀지않은 곳에 있어서 택시를 탔다.

그곳은 여전했다.

작고 어두웠으며 여전히 그때의 노래들이 틀어져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맨구석 소파에서 그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앉아있는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왔네. 안오면 섭섭할뻔했다."

반가워하는 그여자의 목소리가 참 밝게들린다.

최대한 행복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속마음은 너무도 슬펐지만....

작은폭포의 간판도 슬펐고 그여자의 밝은 목소리도 슬펐고 나의 거짓웃음도 너무 슬펐다.

안으로 들어서자 몇명의 친구들이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구자리가 어색한건 나하나인듯했다.

주인아저씨가 아는체를 해왔다.

민망하지만 안그런척 하려고 애썼다.

그친구들의 수다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남자와의 기억들만이 내뇌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블랙홀있쟎아. 얼마전에 결혼했쟎아 그여자애랑..."

순간 눈이 커지는걸 느꼈다.

블랙홀은 그남자의 별명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매력에 빠질수 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곤 했는데 자연스럽게 별명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여자애는 누굴까??

밝은 목소리의 그여자가 말한 그 여자애란 다름아닌 채였다.

채와는 학교동창이었는데 성씨가 채씨라서 교수가 별명으로 불렀다.

근데 설마 그남자와 채와 결혼을 할만큼 잘알던 사이였을까?

아니다 그럴리가 없는데

목이 따끔거렸다.

자꾸만 눈에 눈물이 고이는것 같았다.

 

그남자가 군대에 가기전 그남자의 친구들과 나의 친구들이 기차역으로 환송회를

해주러 간적이 있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역으로 들어가던 그남자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기다리라는 소리나지 않는 말을했다.

그남자의 어머니가 옆에 와있어서 별다른 행동을 할수는 없었다.

우리는 다같이 손을 흔들어 잘갔다 오기를 바랬는데...

그런데 그남자와 결혼한다는 채도 그자리에 있었다.

그냥 아는사이라서 나온줄 알고있었는데

그 기다리라는 입모양이 나에게 한말인줄만 알았는데.....

하긴 그남자를 만나 물어보질 않았으니 자세히는 알수 없지만 왠지

서운한 기분은 감출수가 없었다.

아무말없이 계속 얘기를 듣고있자니 화가 나는듯했다.

나는 내자신이 한심스러워 견딜수가 없었다.

왜 하필 채였을까?

그친구들과 헤어지고 작은폭포를 나오면서도 허무했다.

그남자와의 옛날일들이 다 거짓말만 같았고 그남자의 전화도 사기같았다.

겨우겨우 섬으로 돌아온 나는 그남자를 생각하며 한번 울었고 나를 보며 또한번 울었다.

그리고 나의 파란대문을 보고 또 울었다.

그리고는 이틀을 꼼짝않고 잠만잤다.

스스로가 한심하고 가엾어서 미칠것만 같았다.

사흘뒤에 난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새벽무렵 등대 옆 바위위에서 멍하니 앉아있기도 했다.

 

섬밖으로 나가는 날이 됐는지 선아가 새벽부터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고있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선아의 손을 잡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남자덕분에 생긴 쓸데없는 취미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고 아니 이제는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지만

선아가 좋아하는 대형마트에만 들르기로 했다.

이제는 그남자와의 추억을 쫓지않기로 맘먹고 마지막으로 작은폭포를 보기로 했다.

선아를 데리고 버스를 탄 나는 혹시 놓칠세라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작은폭포 앞을 지나갈때 괜히 눈물이 흘렀다.

작은폭포의 낡고 작은 간판이 떨어져 검은창문 옆에 세워져 있었고

밤이면 반짝거리던 꼬마전구들이 철거되고 있었다.

정말 마지막이었다.

그남자와의 기억하나가 씁쓸함을 남긴채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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