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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배를 타고 나가면 길게는 세달정도 짧게는 한달정도를
집을 비웠다.
그러면 나는 그 여자와 꼼짝없이 시간을 보내게 됐다.
그 여자의 방에는 화장품이 아주 많이 있었다.
하나같이 고가의 화장품들이었다.
아버지란 사람이 사다준 외국산화장품인 것들이 많았고 제법
비싸다고 하는 브랜드의 화장품들도 제법 많았다.
화장품 사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고 아버지 역시 뭐라하지 않았다.
예전 내엄마는 화장대라는것도 없이 살았건만.....
나는 그여자의 화장대만 보면 미칠듯이 신경질이 났다.
지금은 예전만큼 화장품도 없고 화장품 살 돈도 없어서인지....어쩐지
그때는 그 여자의 화장대에 수북한 화장품을 하나씩 들고나와 마닥에
부어버리던지 학교에 가져다가 친구들에게 하나씩 줘 버렸다.
어떨때는 립스틱이나 눈썹그리는 연필을 가지고 달력 뒷면에
낙서를 해서 못쓰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종의 복수였다.
지금은 아버지가 없어진 이후로 그여자의 기는 많이 죽어버렸다.
그 여자의 듣기싫은 한마디가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빛을 잃는다는것이었다.
그래서 자기도 빛을 잃어 시들시들 해지고 있다고 했다.
구역질이 날 정도의 거창한 말솜씨.......
이 말솜씨도 예전에 아버지가 엄마를 죽게하는데 일조를 했을거라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그여자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 때
마지막으로 배를 타야겠다면서 나간뒤로 소식이 없다.
1년정도 되는 기간동안 배를 타야 했는데 기간이 긴 만큼 돈도
제법 되는 모양이었다.
결국은 돈 때문에 1년짜리 배를 타기로 결심을 한 모양이었는데....
7개월쯤에 집에 가야겠다면서 계약을 무시하고 필리핀에서 배를
타지 않았다고 했다.
같은 배에 있던 선원들은 당연히 집에 간 줄 알았다고 했다.
1년이 지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그여자는 수소문 끝에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들을수 있었고 아버지가 일한 6개월정도의
월급을 챙겨왔다.
근데 아버지는 어딜갔는지 행방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사라졌던지 말았던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여자 혼자서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내가 집에서 3년을 빈둥거리며 놀자 생긴일이었다.
여지껏 아무소식이 없는 아버지를 그여자는 아직도 기다린다.
내가 서른살이 되고 보니 그여자의 모습이 참 측은하기도 하고
가끔은 가엽기도 하다.
시간은 죽도록 미워했던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기도 하는 모양이다.
집에 도착하니 그 측은한 여자가 파란기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그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것만 같아보였다.
"맨날 왜 저래, 지지리 궁상이나 떨구...."
혼자 중얼거리면서 내 방으로 들어가며 방문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
그소리가 마치 내 귀에
"울지마...."하는 소리로 들렸다.
보험가방을 방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베개를 끌어당겨 누웠다.
천장에 야광별이며 달들이 빛을 내려고 폼을 잡고 있다.
고등학교때 붙여놓은것들이 아직도 살아서 깜깜한 밤이면 빛을 내서
내마음을 포근하게 해준다.
눈을 감고 엄마 생각을 해보려고 애썼지만 엄마얼굴은
생각나지않고 자꾸만 그여자가 처음 파란지붕집에 올때 모습이 떠오른다.
피보다 더 진한 빨간입술이 머릿속에서 엄마의 얼굴을
조금씩 조금씩 지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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