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잠이 깨면 다시 잠들지 못하고 거실을 서성거린다. 무엇인가 잊은 것이, 잃어버린 것이 있는 것 같은 허전한 마음에 내가 걸어온 길을 자주 돌아보게 된다. 그러다 한 수픈, 두 수픈, 잊고 산 기억을 끄집어내듯이 커피를 추출기로 옮겨 담는다. 이내 쌓인 세월의 더께를 밀듯 김은 오르고 가슴속 깊이 가라앉아 잔잔하던 기억도 덩달아 나풀나풀 날아오른다. 허공을 향해 손을 뻗어 힘껏 움켜잡아본다. 혹여나 내게서 저만큼 멀어진 시간이 잡힐 것 같아서다. 지난날을 아름답게 추억하는 것은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서라고 하던가, 눈을 감으면 언제나 단발머리의 열네 살 나를 만난다.
중학교 다닐 때, 수업을 마치고 하굣길은 늘 지쳐 있었다. 한 시간을 넘게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무거운 책가방 속에서 빈 도시락은 왜 그리도 요란한 소리를 내는지. 걸음이 빨라질수록 그 소리도 점점 커져서 가방을 내려놓아도 귀에서 딸그락 소리가 들리고는 하였다. 먼 길을 걸어 다니면서도 한 가지 위안으로 삼았던 것은 배고픔을 면하는 호사스런 날이 더러더러 있어서이다. 왜 그리도 배는 고팠는지 그때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학교 옆에는 또래의 아이들이 잘 가던 빵집이 있었는데 그 집 빵은 아주 작아서 한입에 쏙 들어갔다. 맛 또한 혀끝에서 척 감겨들기에 백 원에 열 개인 빵을 다 먹고도 아쉬움이 남았다. 접시 한쪽에 붙은 설탕 가루를 손끝에 찍어 입속에 밀어 넣으며 매번 딱 하나만 더 먹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일어서야 했다.
빵집에는 키가 커 보였던 주인 남자가 잘 부풀어 오른 반죽 덩이를 밀어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매만지듯 정성을 다해 작품처럼 동글동글 예쁜 빵을 빚었다. 부부가 함께 일하면서도 마주 보는 눈길은 따뜻해 보였고 서로 위하는 마음은 바라보는 나에게로 전염되어 미소 짓게 하였다.
빵집에서의 그 맛을 잊지 못해서 또래 친구들이 모여 멀건 밀가루 반죽을 빵틀에 부어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말 힘들어했던 것은 몸으로 느끼는 배고픔이 아니라 정신적인 허기였다.
빵집 부부의 하루가 시도 때도 없이 내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오는 날에는 세월이 더디게 간다고 안달복달하였고 빨리 스무 살이 되기를 무던히도 기다렸다. 스무 살에 대한, 서른에 대한 준비도 없이 세월만 바라기 하던 내게 많이 먹고 얼른 커야지, 하던 어머니의 세월도 기다림의 세월이었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아버지는 얼굴 보기가 힘들었고 어머니에게 무심했다. 어머니의 고행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 무표정한 모습이다. 가끔 밥그릇에 물을 부어 밥상을 물리는 걸로 엄마의 마음을 위로했는지 모른다. 식구 중, 밥을 남기는 사람이 없으면 엄마의 저녁은 눌은밥이다. 눌은밥도 없는 날이 있었다. 아무리 넉넉하게 지어도 밥이 부족했다. 왜 그리도 손님은 많이 오는지 집안은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어머니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분명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어머니는 보리쌀이 담긴 함지박에서 물로 씻기 전, 듬뿍듬뿍 보리쌀을 다시 덜어냈다. 당시는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고 국가는 정책적으로 절미운동을 시행하였는데 어머니도 열심히 동참하셨다. 그 이면에는 밥이 모자라면 식구가 단출한 집에 딸을 시집보낼 수 있다는 속설을 엄마는 희망으로 삼으셨던 것이다. 어쩌면 당신의 고행이 딸인 내게 그대로 이어질까, 그것이 걱정이었기에 나름의 비방을 썼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 물정 어둑하던 나는 스물 몇 해가 되면 내 삶이 확 달라질 것이라 믿었다. 적어도 어머니처럼 오랜 관습에 얽혀 힘겹게 살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쳤다. 지금 나는, 엄마가 그토록 기다리던 세월을 지나서 한참을 더 온 시간에 와 있다. 그러나 크게 달라진 것도 없다. 엄마의 딸인 나는 어머니처럼 그 관습에 순응하면서 엄마의 시간을 뒤밟는 모습이다.
지갑 속에는, 그때 간절하게 딱 하나만 하던 빵을 백 개쯤은 살 수가 있다. 아니 더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는 시간을 되돌리기 하고 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때가 내 삶에서 가장 눈부셨던 날은 아니었는지, 그날이 자꾸만 그립다.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송홧가루 묻어 지문을 찍고, 개구리 목청껏 울어대는 밤이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