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6월이면 여기에 들어 온 지도 5년이다.
이만큼의 세월이 흐르고보니 이 시골살이도 이제는 이해
할만큼...아니 내 아픔을 이렇게 지면에 옮길 수 있는 여
유가 내게도 찾아온다.
결혼하여 아이들 자랄때까지 가정에만 묻혀 살던 나는
남편의 한 순간의 실수로 모든것을 잃었다.
내 집도 내가 가꾸어오던 내 미래도..
친구들과의 만남도 회피하게되었고 그냥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는 시간이 많았다.
친정아버지가 술을 못하셨기에 우리들도 술을 입에 대
지도 못했는데 밤이면 혼자 술을 홀짝이는 버릇이 생겼
다.
지금도 잊혀지지않는 나와 소주의 첫 만남.
왜 그렇게 쓰든지...지금 어쩌다 남편이 소주를 한 잔 주
면 그때 내 목을 타고 내 슬픔과 함께 내려가든 소주의
그 쓰디 쓴 맛이 올라와 이제는 그 쓴맛을 잊고 싶어 사
양한다.
어느날 밤 너무 가슴이 답답하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어 술을 물컵에 무작정 가득히 따라 주욱 들이켰다.
순간..
머리가 띵하고 돌더니 쿵하고 쓰러졌다.
가슴앓이를 하던 때라 몸도 마음도 지쳐 있다가 빈 속에
소주를 물처럼 들이켰으니..
방에 있던 남편이 뛰어 나와서 축 늘어진 나를 질질 끌고
방으로 들어가는것을 느끼면서 그냥 이대로 죽었으면하
고 바랐다.
남들은 말하기 좋게 바람도 피우는데 바람 피운것도 아
니고 살아볼려고 하다가 모두 잃었는데 그것도 이해 못
하냐고 도리어 나를 속좁은 여자로 취급하였다.
그 전에는 몰랐는데 남들이 말하는 말들 하나하나가 제
삼자들이 지나가면서 흘리는 말로 들릴 뿐, 내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않았다.
부모형제도 그때는 소용이 없었다.
오로지 나 혼자만이 안고 가야할 내 몫이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힘든 생활이 계속되면서 시집에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겼다.
어머님이 세상 모두를 준다해도 바꾸지 않겠다던 아주범
님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
평생을 남편의 든든한 사랑을 받지 못하셨던 어머님은은
절망하셨다.
이제 노후를 큰 아들에게 맡기고 조용히 살고 싶어 하셨
는데 그 아들이 어머님을 남겨두고 떠나신것이다.
그 와중에 아주버님 보상비를 동서는 어머님께는 쓰다달
다 말 한 마디 없이 보상금을 모두 챙기고는 어머님께는
자식을 잃은 그 심정까지 헤아려 드리지 못하고 자식하
고 살아야겠다며 어머님께 모진 소리로 못을 박았다.
어머님도 돈이 탐이 나서 그러지 않았다고 후에 내게 말
씀하셨다.
** 지(큰며느리)도 자식들과 살아야하니 내가 큰 돈 달라
고 했나. 그 많은 돈 너희들 앞으로 넣을 만큼 넣고, 우리
두 늙은이도 아들 잃은 마음을 돈으로 해결할 수없겠지
만 내가 어려우니까 조금만 통장에 넣어달라고...**
끝내 동서는 모른 채 하였다.
어머님은 그게 너무 원통하시다고 말씀하신다.
**그래도 지하고 내하고 고부지간으로 산 게 얼마인데
우에 이렇게 자식 키우는 에미 속을 모르는가하고** 통
곡하셨다.
참 5년간 어머님과 부대끼면서 많은 어머님의 넋두리를
나 홀로 소화 시켜야했다.
아버님과의 소원함도 큰자식을 잃은 슬픔을 큰며느리의
야속함도.....노인네들은 몸은 움직이지 못하셔도 드신게
모두 입으로 양기가 (어머님 표현)올라 지치지도 않고 넋
두리를 쏟아 놓으셨다.
어머님과의 시골살이가 처음이다보니 어머님을 파악하
지 못하여 처음에는 많이 들어주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나도 힘든점이 많아 차차 어머님의 넋두리가 나도 지겨
워져갔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 회의가 들었다.
**왜! 나는 이것밖에 살지 못할까?**
남들은 잘도 살더니만 나 혼자도 이 상황을 감내하기가
벅찬데 어머님의 신세한탄까지 내가 모두 들어야하며 아
버님 어머님의 중간에서 두 분의 사이를 호전시키기 위
하여 이렇게 고군분투 해야하는가 말이야..라고
그러면서 이렇게 만든 남편이 미워 밤이면 이불 하나를
돌돌 말아 혼자 한 쪽 구석에가서 아예 남편이 옆에 얼씬
도 못하게 내 마음에 빗장을 단단히 걸었다.
이 모든 상황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얼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