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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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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때문에 남동생과 싸웠는데..


BY 천정자 2014-02-08



작년에 친 남동생과 한 바탕 대판 싸웠다.

그것도 친정 엄마 앞에서 말이다.

앞으로 누나인 나에게 누나라고 부르지도 않는단다.

싸움의 원인은 부연 설명 없이 돈 때문이다.

그것도 내가 돈을 꿔서 안 갚은 것도 아니고 제대로 돈 한 번 꿔달라고 해서

그런 적도 없는 큰 남동생한테 막내 남동생에게 누나인 내가 신용불량자로 만들었다며 책임지라는 듯이 따지고 나에게 덤볐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폭삭 폭탄 맞은 기분이다. 

막내 남동생은 약 칠 년 전에 다단계 하는 여자친구를 잘 못 만나 카드로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막지 못해 누나인 나에게 보증을 부탁해 해 줬지만, 나도 부도가 나는 바람에 둘 다 같이 신불자가 되어었는데, 칠 개월도 아닌 칠 년 전 애길 이제야 알고 큰 형이라고 누나인 나이게 입장 세울려고 했었나 나를 보고 오빠처럼 혼을 낸 것처럼 나에게 위 아래 구분없이 막무가내로 따졌지만. 이젠 막내 남동생도 나도 신불자에서 벗어 난 지 한 삼 년 되었는데, 진짜 돈 한 번 오부지게 빌려 달라고 하고 욕을 먹었으면 덜 억울하겠다 싶었다.  좀 일찍 따질일이지 장례식장에 가서 실컷 울고 누가 죽었냐고 물어봤다는 식이다. 문제는 그걸 옆에서 다 구경하신 울 엄마다. 처음으로 남매가 싸우는 것을  보시니 얼마나 가슴이 뛰고 놀라 입이 벌어져 어떻게 할 줄 모르고 당황하셔서 제대로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셨다.

 

 돈이라는 것이 가족간에 우애도 생기게 하겠지만, 요즘은 있던 우애도 돈 준다면 얼른 팔아 먹을 데가 없어서 불행 중에 다행이라면 모를까 못 팔아도 우애있는 형제도 참 구경하기 힘든 세상이 지금이다. 특히 부모 돌아가시면 이 땐 정말 서로 죽이네 살리고도 모자라 원수보다 더한 남도 되는데, 울 엄마는 말로만 들었던 형제 간의 싸움을 직접 목격하셨으니 그 날 이 후로 잠을 못 자 몇 칠을 불면증에 시달리셨다. 큰 남동생은 나중에 본인이 잘못했다고 마음이 불편하고 내가 왜 그런 실수를 누나에게 했는지 모르겠다고 엄마한테 사과를 했는데도 영 진정을 못하시겠다고 몇 날 몇 칠을 나에게 전화를 하신다. 정작 사과는 내가 받아도 시원찮은데 나도 남동생한테 전화를 해서 나에게는 왜 사과안하고 엄마한테 한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어지냐고 못 따지는 사람이 아닌데도 괜히 윗 사람이 동생보다 낫다고 하는 옛날 말이 자꾸 나를 멈추게 했었다. 형만한 아우 없다더니 누나만한 남동생 어디 있을까 이런 심정으로 되레 울 엄마를 진정 시키는 것이 더욱 급선무였다.

 

내가 국민학교 4학면 겨울에 울 엄마는 우리 네 남매를 모두 데리고 경기도 어디인가 잘 기억이 안나지만 , 고아원에 전부 입소를 해서 살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나도 여자가 아이 넷을 혼자 키우고 부양하고 살라고 누가 시키면 당신 먼저 한 번 시범을 보이고 그렇게 따라 한다고 할 수 있으면 따라 한다고 모를까 절대 알고는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지나갔기 때문에 다행이다 싶을 정도다. 남자아이 셋에 아버지를 꼭 빼닮아 못생긴 딸인 나까지 몽땅 고아원에 맡기고 울 엄마가 재가를 하셨다고 해도 죄가 안되는 그 땐 그런 세상이었다. 그런데도 울 엄마는 그 고아원에 식당에서 일을 하는 조건으로 목사이기도 했던 고아원 원장에게 고등학교 까지 가르쳐 준다는 약속을 믿고 일을 하셨는데, 어린 나는 집에서 살다가 그 크고 많은 원생에게 일단 기가 질려 매일 같이 징징 대고 울었다. 먹는 것도 형편 없었다. 차라리 엄마가 새벽에 나가 파출부로 일하셔서 비록 남의 집에 얻어 온 김치나 반찬이 나았지, 날마다 소금국에 보리밥은 정말 우리가 돼지우리에 갇힌 동물이 된 느낌이었다.

 

역시 울 엄마는 이런 상황을 다 직접 겪어 보시고 과감히 울 네 남매를 몽땅 데리고 야반도주를 감행하셨다. 아마 국민학교 4학년 겨울방학이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학교도 주소도 모두 다 고아원에 이전하였으면 꼼짝없이 우리 네남매는 고아원의 고아가 될 뻔 했다. 아무튼 울 엄마는 우릴 그렇게 지켜내시고 키우느라 먹는 것만 어떻게 어떻게 연명했지만, 이미 나는 그 고아원만 안가면 만사 다 좋은 일이 된 것이다. 집에서 엄마대신 밥을 해먹든 청소를 하든 누구하나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우린 네남매는 교육적으론 방치된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학교도 엄마가 새벽에 남의 집에 밥하러 가시면 나는 학교도 늦게 가든 결석을 해도 밤늦게 돌아오는 울엄마는 확인 하는 방법이라면 우리에게 직접 물어 보는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거짓말해도 당장 확인 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공부도 숙제도 순전히 내 맘대로 결정하게 되었다. 나도 이런데 남동생들은 더 하면 더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없이 자란 환경은 진짜 나중에 알게 된다는 것을 나는 절실히 깨달은 적이 한 두번 아니었다. 아버지한테 나이들어서라도 쫒아 다니면서 맞았다고 하는 그런 애길 들어도 그래도 일곱살에 돌아가신 울 아버지보다 훨씬 나은 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했었다. 늦은 결혼을 하고 난 후 남편은 장인 산소를 찾아간다고 하는데, 딸인 나는 도무지 우리 아버지 산소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못했고, 결국 우리 아버지 묘지를 남에게 물어 물어 찾아 갈때는 참 사는 것이 뭔지 아버지 묘소를 찾는 동안 울 엄마도 사위한테 얼마나 미안하셨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세월이 이렇게 후다닥 지나갈 줄이야 미처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래도 우린 고아가 안됐고 홀어머니라도 살아 계시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 큰 남동생이 사단을 낸 것이다. 누나에게 정말 돈을 빌려 줘 돈을 떼인 것도 아니고, 정말 한 번이라도 내가 찾아 다니면서 돈을 꿔 달라고 했으면 핑계라도 좋으련만 없던 일을 일부러 만들어 싸울 나이도 지났는데, 다 큰 자식들이 울엄마 앞에서 보란듯이 싸움질을 했으니 울엄마가 그렇게 어렵게 키운 공로가 말짱 도루묵이 된 것이다. 나도 누나로서 한 마디 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직접 거래한 당사자들도 사실 확인하고 싸워도 될까 말까한 싸움을 하다보니 어이가 상실되고 황당하였다. 그렇게 몇 주 동안 잠을 못 주무시니까 큰 남동생도 어쩔 줄 모르고 날마다 잘못했다고 해도 울엄마는 충격이 너무 크셨나 나에게 전화를 또 하셨다.

 

" 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희들을 잘 못 키운 것 같다. 내 잘못이 크다.."

울멈마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자꾸 메아리로 뱅뱅 내 귓가에 맴돌았다. 말 한 마디는 많은 의미를 담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 말을 잘 못해서 우린 많은 상처를 무수히 당하고 또 당하는데도, 아버지가 없이 자란 환경은 , 곧 본 것 없고 배운 것 없다는 시쳇말로 그 말이 우리 네 남매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싶었다. 마음대로 마음 가는데로 산다는 것이 얾마나 위험한 상황을 초래하는 것인지 정말 절감한다고 나는 울엄마한테 어려운 말 한마디를 해 드렸다.

 

" 엄마 ! 우리 네 남매를 고아원에 맡기지 않고 재가도 안하시고 직접 키워주신것이 무슨 잘못이예요. 그 동안 우릴 이렇게라도 사람으로 만들어 보실려고 애쓴게 얼마나 큰 일인데, 단지 아버지 없는 자리를 엄마가 너무 감당하기 힘든 역활이어서 우리 애비없는 자식들이라도 고아는 아닌 것이 너무 고맙고 감사해요. 우리가 싸운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니까 엄마가 마음이 편안해야 잠을 잘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엄마 죄송해요! "

 

하나 밖에 없는 딸인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나를 낳아주신 울 엄마한테 고맙다고 했으니  이런 불효자가 어디있을까 싶다. 정말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남편 만나 살다보니 매 번 느낀다.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는 부존재는 많은 상황을 초래하고 좋은 것보다 전혀 관계없는 좋지 못한 상황이 곳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현재 우리 엄마는 권사님이시다. 권사가 되기 전에도 된 후에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은 기도를 늘 우리 네 남매를 위해서 하신다.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잘 살게 된 것은 울 엄마의 기도 덕분이었다. 이젠 딸인 내가 늘 기도를 한다.

 

이 번 설에 사정이 있어 찾아뵙지 못했다. 솔직히 남동생도 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세월이 흘러야  서로에게 잊혀지는 처방이 된다는 것이 기다려야 온다는 것을이제 조금  알게 되었다. 당장 안 따져도 저절로 밝혀지는 진실처럼 말이다.

명절 끝에 또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명절을 잘 지내셨냐고 여쭤보니

" 야야 니가 해 준 말에 내가 이제 잠이 다온다 고맙다 야야!" 

딸인 나에게 위로를 받았다고 이젠 목소리도 명랑하시다.

 

아! 그 말씀을 들으니까 갑자기 울 아부지가 보고싶다.

거울들고 내 얼굴을 드려다 본다. 맨날 울엄마는 늘 그러셨다.

"으이그 이거 사 누가 니 애비 아니랄까봐 그렇게 똑같냐?"

내 얼굴이 곧 아버지 얼굴이라는 말씀이다. 이미 일곱살 어린 기억에 흔적조차 사라진 아버지 얼굴인데. 

꽃피고 새우는 봄되면 산소를 찾아 뵈어야 겠다.

아버지 닮은 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