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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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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건망증 걸린 환자


BY 천정자 2012-07-06

뭘 잃어버려도 무엇인지 몰라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자 이러다 퍼뜩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력을 가진 나는 중증건망증 환자라고 하면 딱 맞춤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냐고 혼자 한탄해도 내일 되면 또 잊어버리기 선수이니, 금붕어 기억력 3초나 내 기억력이나 누가 재보고 그런 통계를 내지 않은 게 다행이다.

 

건망증에 자주 걸리면 자주 가던 길도 한동안 안가면 그 길이 어딘가 가다가 또 잊어버리고, 네비를 달아도 작동을 잘 못 시키는 걸 누구보다 내가 더 잘아는 기계치니까 아예 설치도 않했다. 그래서 어딜 가려면 아는 길만 다닌다. 그 길이 돌고 돌아도 멀어도 할 수 없다. 엉뚱하게 헤메다가 못 찾아 가면 나만 손해니까.

 

그런데 이 건망증이 요즘 나에겐 아주 유용하다. 특히 인간관계에선 아주 탁월하게 이용된다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누굴 만나긴 만났는데, 그 사람이 평소 내가 좀 미워하거나 싫은 사람들이었으면 좀 더 특별하게 기억을 해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 건망증이 그 때마다 도져 대체 이 사람이 누군지 전혀 기억이 없다. 되레 상대가 내가 어디서 만났잖아요 내 이름을 불러 주면 뭐하나 나는 그 사람 얼굴도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내 이름까지 기억해주는 사람에게 당신 누구세요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는 척을 하고 악수를 하고 안부 묻고 받아도 내 기억력에 입력은 오늘 처음 본 사람 이렇게 기억한다. 문제는 집에 가서 밥 잘먹고 잠 잘려고 베개를 머리에 대는 순간 그 때 생각난다는 것이다. 나를 참 곤란하게 해서 어렵게 했던 사람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아서, 아니 웬수를 길거리에서 만나도 몰라보는 이 건망증에 대해서 고맙다고 해야 될지 말지다. 젊을 땐 젊어서 너무 또렷해서 잊혀지지 않는 다는 별로 좋지 않은 과거가 건망증에 걸린 덕분에 저절로 자동으로 잊혀졌으니, 어떻게 보면 아픈 기억 때문에 상처가 깊어 우울증 걸린 것보다 나을 듯 싶었다.  

 

 어릴 적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더니 이 친군 너무 기억력이 좋다.

내가 한 일이나 말들을 어떻게 조목조목 다 기억을 해서 니가 이랬더라 저랬더라 하는데

난 도무지 기억이 없다. 그나마 내 친구의 기억력 덕분에 내가 어렸을 때 무엇을 말하고 놀았는지 남의 기억력에 내 어린 추억을 건지니 내 머릿속을 다시 헤집고 싶지만 그것도 할 짓도 아니다.

 

친구의 기억력 덕분에 어렸을 땐 내가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엉뚱하고 말도 잘하고 잘 놀았단다. 그래서 공부는 잘 못했다고 하더니, 잘 씻지 않아서 머리에 이가 있어 늘 머리를 긁고 다녔다나.

에그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그 말은 안했슴 좋겠구먼 다른 추억보다 더 자세하게 애길 하니

그 말을 듣고 내 머리가 갑자기 가려운 것 같다고 했더니 친구가 키득키득 웃는다.

 

웃던 친구가 갑자기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왜그러냐고 하니 자기가 누구에게도 말 못할 병에 걸렸는데

나한테만 말하고 싶단다. 나는 이거 당장 시한부에 걸린 것 아닌가 싶고, 무슨 큰 중병에 걸려 아무에게도 말 못할 병을 나에게만 말한다니 이거 들어 주어야 되나 백배 부담이었다.

 

자신이 우울증에 걸린 지 몇 년이 되었고, 지금도 약을 복용중이란다.  

그런데 남편은 이 병을 병취급도 안한단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이 말을 하면서 남편이 자신에게 했던 말과 행동들을 언제 어떻게 하는지,

내가 친구 말을 듣고 그림이 생생하게 그려질 정도다.

아무래도 이 친구가 나보다 더 말을 잘하는 것이다.

 

자식도 다 소용없고, 아프니까 친정도 갈 데가 아니라나.

그 동안 혼자 병원 다니면서 의사한테만 애길하고 남편만 알고 다른 가족은 전혀 모른단다.

어떻게 하면 좋냐고 한다.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나만 없으면 될 것 같은 이 세상에 내가 왜 태어났는지

이유를 묻고 싶단다. 친구 말을 듣다가 나도 할 수 없이 대답을 하긴 해야 되겠는데.

 

진짜 똑똑하고 공부도 잘한 친구라고 그렇게 기억되는 친구의 어릴 적 상황은 거기 까지만이다.  기억 안나는데 머리를 꼬집을 수도 없고, 나에게만 털어 놓은 속 아픈 애길 떠들어 대면 사생활 폭로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난처하다.

 

' 내가 무슨 애길 해주고 싶은데 ..." 했더니

친구는 또 환하게 웃는다. 괜찮단다. 그래도 나에게라도 말을 했더니 맘이 편하단다.

그래 말 할 데가 없는 것처럼 비참 한 것 없다.

나도 혼자 주절주절 떠드는 곳을 만들어 떠든지 벌써 10년이 다 되가는데

누가 읽던 말던 많이 보던 말던 그게 뭐 대순가?

 

그래도 이 친구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퍼뜩 떠올랐다.

" 야야..니도 나처럼 건망증이나 걸렸슴 좋겠다!" 했더니

이 친구 와하하 웃는다.

 

그래 자꾸 웃어야 그 나쁜 우울한 균둘이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다고 했다.

기운내라. 살다보면 어떻게 매번 좋은 일만 생겨 날마다 좋은 날만 생기라고 빌어도 있을지 말지다. 그 날 그 날 오늘만이라도 모든 걸 건망증에 걸려 잊어도 괜찮은 하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