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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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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으면 알게 되는 것들.,


BY 천정자 2012-05-15

수다 떨다가 갑자기 내가 지금 어디까지 애기했더라 머릿속이 갑자기 하얀 도화지가 된 적이 종종 생긴다. 처음엔 많이 당황했는데, 나중에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 친구도 전화해서 실컷 수다를 떨고 난 후에도 또 모자라 만나서 한 애기는 전화로 이미 떨은 수다가 더 많다. 내가 한 말이 글씨처럼 새겨지지 않고 공중에서 사라지길 다행이지 안그럼 한 말 또 하고 하면 그게 말무덤처럼 수북히 쌓여 어디 둘데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들은 말 또 들어도 잘 잊어먹으니 적어 놓지 않음 들을 때마다 새로울 때가 있으니 이게 다 나이탓으로 돌린다.

' 너두 나이먹어 봐라"

" 너두 늙어보면 안다'

 

요즘은 내 친구들이 딸이 일찍 시집가면 장모님 되고

아들이 장가가면 시어머니가 된 친구도 하나 있다.

오랜 만에 만나면 절대 애들 애길 하지 말라고 한다.

자긴 할머니도 장모님도 시어머니가 아닌 친구니까 그런 애길 하지 말자더니

듣는 나는 내내 어쩌다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한 살 더 많은 여학생하고 살림 차려준 애길 옆에 테이블 사람도 들을만큼 목소리도 우렁차다. 오히려 내가 목소리 좀 줄이라고 해도 처음엔 작게 나와도 나중엔 손녀딸 애기 나올 때 그야말로 거침없이 나팔수다. 

장모님 된 친구는 딸이 바로 옆 동네에 너른 아파트에서 사는 바람에 수시로 드나드는데,경비가 친정에서 오셨냐고 인사하더란다. 어떻게 알았냐고 했더니, 시어머니들은 아예 출입구에 택배부치듯 물건을 맡기고 그냥 간단다. 아님 아예 오지도 않고 택배를 부치는 분은 시어머니이고, 직접 오시는 분은 장모님이고 유일하게 비번도 묻지 않고 출입이 가능하니 그걸 보면 어디서 오셨는지 턱보면 안단다. 냉장고 문을 열고 청소해주는 친정어머니는 있지만, 현관의 비밀번호 모르는 시어머니는 아예 오지도 않는단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아파트들은 전부 비밀번호 모르면 못여는 문이다.

 

그 애길 들으니 울 아들도 몇 년후면 장가 갈 나인데, 이거 아파트에서 신혼 살림 할 것은 뻔하고, 그렇다고 지금도 나는 냉장고청소를 잘 못하는 살림치 시어머니가 며느리 냉장고를 연다고 별 수가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장모도 되고 시어머니도 된다. 이레 저래 어디를 가도 냉장고 청소는 지들이 알아서 하라고 해야지. 나도 잘 못하는 거 애들한테 뭘 가르칠까.

 

손녀딸이 왜그리 귀엽고 이쁜지 모르겠단다. 애들 봐주는 거 공 없다고 하는데도 고것이 아른아른하고 애들 옷을 보면 저걸 입히고 싶고 사주고 싶단다. 그래서 나보고 백화점 같이 가자는데 내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야야..그냥 그 돈 만큼 상품권으로 줘라 니 사주고도 욕먹는다아!"

옆에 묵묵히 듣고 있던 다른 친구들도 맞장구 쳐준다.

아님 그 옷 사면 반드시 영수증도 같이 줘라.

어린 손녀딸은 입으면 그만이지만, 며느리 맘에 안들면 다시 교환한다고 전화온단다.

어디서 샀냐고 꼭 묻는단다.  

 

우리 애들이 어렷을 땐 시어머니가 직접 해 온 떡이며, 옷에 그저 오신 것 만으로도 고마웠었는데, 지금은 내가 그렇게 하려고 해도 세월이 변했다는 애기다. 잠모님이 냉장고를 채워주고 치워줘도 별 탈이 없을 시대가 온 것을 알고, 당연히 시어머니는 영수증 같이 부치는 택배로 대신 뜻을 전달하는 때라니, 가만히 또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는 이중역활을 다해야 한다. 냉장고 청소도, 김치를 잘담아 택배로 부치는 시어머니 노릇도 전혀 못할 것임이 틀림없다. 지금도 내가 담은 김치는 반신 반의다. 또 모르겠다. 남편이 해준다면 어떻게 해줄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내가 하지말라고 말릴 것이다.

 

까짓거 애들 그만큼 키워서 결혼했으면 지들 앞가림 잘하고 가정 잘지키고 애들 잘키우면 효자다 이렇게 칭찬만 해줘도 충분하다. 요즘 조부모들이 손자손녀 키우느라 고생이신 분들 참 많다. 행복한 애길 하자면 끝이 없지만, 불행하거나 비교당하느라 본인들이 더 궁색한 처지가 비일비재하다. 교육이야 평준화덕분에 어지간하면 다 엇비슷한 환경인데, 거기서 키잰다고 한들 사는 모양새가 비스므레한 것 같다. 울 아들이라고 나의 딸이라고 비껴가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나이먹은 내 친구들이 엉덩이 싸이즈만큼 배포도 두둑하다. 옛날에 저녁무렵이면 밥하러 간다고 애들온다고 벌떡 일어나 가버리더니 지금은 집에 전화한다.

' 나 오늘 밥먹고 가니까 늦어 기다리지 말고 밥 먹어!"

한 친구는 문자한다.

" 오늘 저녁은 셀프!"

집에 삼식이 있다는 내 친구의 표정이 묘하다.

나도 무슨 애길 할까 궁금해서 쳐다봤더니 웃으면서 그런다.

" 곰탕 끓여 놨으니까 가스불만 키면 알아서 해먹으라고 했어!"

이미 외출할 때 미리 말했단다.

 

더 나이들기 전에 스스로 잘 해결하기를 가르쳐야 한단다.

남편을 가르치고 나온 친구의 얼굴이 전에보다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