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있는 동안 잘먹고 잘살자 주의로 푯대로 목표로 세워 살았나보다.
나도 모르게 어렸을 때 그 지긋지긋한 가난함으로 인해 겪은 설움이
한이 되어 뭘 입을까 뭘 먹을까에서 건강식으로 방향을 바뀌더니 이젠 가장 좋은 거 아니면 안 될 명품인생이 될 지 모르는 불안감이 덮혀 온다.
그렇다고 지금 잘 사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나는 통장에 잔고를 채울 걱정을 하고
돈이 입금되도 곧 빠져나갈 각종 공과금에 보험료에 늘 전전긍긍하고 있다.
도대체 잘 산다는 뜻이 뭘까?
잘 살았다가 세상 떠났다는 사람들 족적을 보면 별 것도 아닌데 그게 별 것 아닌것이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을 보니 잘 살았다는 말은 장수의 기준도 아닌 것 같고, 돈방석에 앉아만 있다가 돈을 펑펑 쓰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사람들 애기만은 아닐 거라는 예측을 하게 됐다.
지금은 가을이다. 노란 잎이 다닥다닥 붙은 은행나무 밑에서 긴 장대로 은행을 턴다. 후두둑 은행알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지나가면서 나도 웃으개 한 마디 했다.
"지금 은행터시는 거예요?"
은행 터시는 할아버지가 허허 너털웃음을 웃으신다.
사람으로 잘 살았다는 종류나 목록이 있을텐데 사람으로 태어나 가을에 수확을 하는 체험을 겪지 않는다면
좀 재미가 없을 것이고, 그래선가 늘 채집하고 수확하고 거둬들이는 일이 평생 하는 일인만큼 가장 거룩한 행사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어떻게 사나 무엇을 할까 이런 고민은 살아있는 자의 특혜이고 권리다.
내가 누군가와 같이 사는 동안 그 고민은 두 배나 세 배나 될 것이고
가장 행복한 고민이 될 수도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죽기 직전에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얼마나 많은 걸까
고르고 골라서 움직이는 정신이 행동을 하게 한다.
가을하늘이 높다. 이젠 그 높이에 감탄하기보다 하늘 밑에서 오늘 나는 무엇을 생각할까 고민을 좀 해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