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항상 걸리는 감기가 이 번 가을에도 걸렸는데 영 나을 기미가 안보인다.
가래에 콧물에 어쩌다가 식사를 같이 하는 사람들 앞에서 콧물 줄줄 새고 연신 막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한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 약을 왜 안먹냐고 주사 한 방이면 금방 나을 건데
아픈 나보다 더 성화다. 하도 닥달하니 할 수 없이 한마디 했다.
"바이러스도 내 몸에서 살다 살다가 뒈지겠지 좀 기다려줘야지 뭐.."
이젠 그러려니 주위에서 알아서 챙긴다.
감기엔 뭐니 뭐니 해도 매운 고춧가루에 소주를 붓고 한 잔 마시라느니.콩나물 듬뿍 담아 고춧가루 범벅이 된 아구찜이 감기 뚝하고 떨어져 나간다고 하더니 한 친군 아예 나에게 접근근지 명령도 내렸다. 다 나을 때까지 전화만 하라고 한다. 달리 줄 것 없는 내가 하고 많은 것 중에 감기 전염시키면 좋은 소리 못 들을 것 뻔하다.
감기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가을냄새를 통 못 맡는다. 눈에서 열이 나니까 눈감고 있으면 잠이 오니 잠자다가 하루 보낸 적도 있고, 기침이 계속나와 두루마기 휴지를 아예 손에 달고 산 하루도 있었다. 몇 칠 견디면 낫겠지 했더니 이번엔 지끈지끈 두통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몸이 내 마음처럼 낫겠다가 아니고 감기바이러스 마음대로 코스별로 증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
옆에서 남편은 늘 하는 잔소리로 그러다가 폐렴 걸린다고 난리고, 할 수 없이 집에서 만든 효소를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기 시작하니 좀 견딜만하다. 에고 그냥 이러다가 나 죽었어유 해도 누구하나 손해 볼 사람 없으니까 다행이고 이런 저런 생각에 마당에 쏟아 붇는 가을 햇볕에 몸 전부 내놓고 걸어 봤다. 늘 살고 있는 집 안마당에 늘 해마다 피는 국화가 드디어 꽃망울이 어떤 이쁜 여자 앵두같은 입술닫은 모습처럼 꼭 닫고 있는 것이랑 가을 하늘색이 어쩜 저렇게 어울릴까 .
긴 장대에 양파망을 걸어 홍시가 되어 나좀 먹어줘요 이런 눈치가 보이는 홍시감을 따서 하나 입에 물어 입안 가득 가을이 달다. 따뜻한 햇볕과 달디 단 홍시를 몇 개 더 따서 소쿠리에 담아 부엌에 놓으니 이보 다 더 좋은 가을놀이가 더 있을까 싶다.
감기걸렸다고 그 핑계로 집에서 뒹굴뒹굴 거리다보니 이게 원래 천성인가 좀체 밖에 나가고 싶지 않다.
가을 하늘 아래 빨간 고추잠자리 여러마리 날더니 노란 황금들녁 지평선 끝에 파란 하늘 낮은 곳에 붉게 물든 야산에 단풍이 드디어 들기 시작했다. 이젠 나도 몇 번의 가을을 지내는지 한 참 헤아려야 하지만
내게 오는 모든 것들은 살면서 한 번즘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고 서운함 없이 떠나가는 인연이었다. 사람과 사람만이 이어진 인연이 아닌 것들이 더 귀하고 새삼 스럽다.
이 가을에 누군들 가슴에 하늘을 걸고 태양을 모른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