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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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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나의 작가방


BY 천정자 2011-04-01

돈 받으러 가다..

나의 글방 제목으로 벌써 횟수로 육년이나 지났다.

 

그 당시 나는 가장 궁핍하고 힘든 때였다.

누굴 부여 잡고 하루종일 하소연 해도 해도 끝이 없을 그 힘든 일들이 겹쳐져

어디로 탈출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한계를 느꼈을 때였다.

 

돈이 없어서 버스 차비가 모자라 아이들 앞세워 한 시간동안 걸어서 다녔고,

뭣도 모르고 겁없이 빌린 사채 빚에 도망다니다가 한 밤중에 사채업자한테 잡혀 그 사무실에서 밤을 꼴딱 세우고 난 후 새벽에 그 거리를 걸어서 걸어서 돌아오다가 길을 잃어 겨우 겨우 집에 찾아오니 아침 8시가 지나 아들이 학교에 간다고 가방을 메고 나오는 걸 잡고

기막혀 눈물도 안 나올때였다.

 

여름에 전깃세를 못 내 냉장고에 있던 냉동된 것들이 줄줄 녹아 그 걸 다 밖으로 꺼내서

집주인이 주는 아이스박스에 어름 한 덩이를 넣고 우선 급한대로 쓰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집에 있는 냉장고랑 가전제품들을 어느날 갑자기 집달리들이 빨간 딱지를 붙이더니 얼마 후 몽땅 다 가져 가버렸다. 주방에 냉장고 있었던 자리에 먼지가 수북히 쌓인 것을 보니 어이가 없고

이젠 죽냐 사냐 그런 것도 아니고 사느냐 마냐 이런 것도 사실 한가로운 사람들 고민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섯살 된 딸아이는 자다가도 몇 번씩 간질발작을 해서 나는 정말 내 정신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찾지도 못했다.

 

슬프다거나 기가 막히다거나 무엇으로도 표현이 안되었다. 더욱 더 황당한 것은 그런 처지에 내몰린 일들을 남편뿐만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는데, 시댁은 전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는거다. 남이야 남이니까 모른척하든 말든 나랑 아무 상관 없지만. 이혼한 며느리도 아닌 손자 손녀를 낳은 며느리가 그 어려운 일을 걸어서 오 분거리인 곳에서 사는 큰아들네가 당하고 있는데도 아무도 어떻게 된 일이냐고 전화 한 통화도 오지 않았고 시집식구는 아무도 찾아 오지 않았었다. 친척에게 전화를 하면 처음엔 전화라도 받아주더니 나중엔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무리 어려운 일 당해도 먼 친척이라도 혹시 돈 빌리러 올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는 애길 들었다. 솔직히 그 당시 전화요금도 못내서 발신이 안되어 전화도 못했다. 

 

지금이야 이렇게 담담하게 글로 풀어내지만 그 땐 꿈에서도 기막혔나 숨도 잘 못 쉬는 가위눌림에 늘 자다가 깨고 깨곤 했다 . 기대는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는 곳에 비벼 볼 희망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또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그 때 그 이후로 나는 시집과 의식과 절차 없는 결별을 하기 시작했고. 돈이 없으니 없는대로 사는 법을 따로 배우기 시작했다. 집에 전기제품들을 몽땅 가져갔다는 애기가 온동네 소문이 돌았나  물어 물어 나를 찾아 온 사람들이 새로운 모델을 사고 쓰던  냉장고를 줄테니 써 보겠냐고 그렇게 직접 1톤트럭에 실어와 설치를 해주고 가시고, 먹을 것에 애들 옷이며 하다못해 쌀까지 날마다 기적같이 그런 일이 벌어지는데 참 그 땐 내가 정신 못차리게 할 정도로 어려웠으니 제대로 고맙다고 일일히 인사를 못한 것이 후회된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맺은 인연이 이어져 요즘은 내가 순례를 하면서 그 때 참 고맙다고 지금은 덕분에 잘 살고 있게 되었다고 마실도 다닌다. 근처에 사시다가 멀리 아파트를 분양 받아 가신 분은 김치가 맛있다고 택배로 부치고 문자를 주신다.  

 

되레 친척이나 가족보다 남이 더 나를 걱정해주고 어떻게 하든 살아야 한다, 애들은 금방 크니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만큼 더 좋은 일이 생긴다고 덕담을 잊지 않고 해주신 어르신도 한 두분이 아니었다. 내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분들을 절대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 때 그 분들에게 어려울 땐 이렇게 살아 내는 거야 .  견디는 것도 배워야 되고 인내도 시간을 많이 먹고 필요한 거라는거, 절대 세상은 공짜가 없고 댓가 없는 것이 없다고 그런 애길 해준 것도 아니고 묵묵히 나를 지켜보시는 분들이 말로 아닌 생활로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어렵게 산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 그 속을 잘 안다고 나도 젊었을 땐 지긋지긋하게 겪은 그 가난이 시간 지나보니 어느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더 기막힌 산교육이었다고 나보고 나중에 더 큰일을 할려면 경험도  쌓아야 재목감이 된다는 말씀도 하신 분이 생각이 난다. 큰 일을 할지 안할지 그건 모르는 일이지만, 맨날 좋은 일만 벌어진다고 해도 그건 정상이 아닐 것이다.

 

세월이 지나 그렇게 어려운 때랑 지금은 천지차이다.  아들은 대학생이 되었고, 아픈 딸도 비록 장애를 가졌지만, 누구에게 빚져 갚을 일 없고, 쌀 떨어져 늘 조바심에 매달릴 일도 없고, 이젠 리모컨으로 누워 내 맘대로 채널 돌리는 내 방에서 배깔고 느러지게 자도 사글세내는 날짜에 가슴 벌렁 거리는 일도 이미 다 옛날에 다 겪었으니 이보다 더 많은 행복을 원한다면 욕심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이다. 그토록 모른척하던 울 시댁이 많이 바뀌었다. 이젠 되레 내가 대접을 받는 일이 생겼다. 나이들어 이젠 시어머니랑 같이 늙어가는 며느리로 생각하시나 나를 굉장히 어려워 하신다. 내가 돈을 많이 벌어 놓은 것도 없고 상냥하지도 못한 무뚝뚝한 며느리가 이뻐보일 리 없는데 집안행사 땐 늘 큰 아들도 아닌 나를 먼저 찾으신단다. 가난한 며느리가 되어 용돈 한 번 못 드리고. 옷 한 벌 사드리지 못하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나에게 잘 해줘도 솔직히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어려울 때 사람 알아본다고 하더니 아마 그 때 죽지않고 아직 아들과 살아주는 것만해도 고마우신 가보다.

 

그냥 예전대로 해도 이젠 맷집이 튼튼해서 이젠 어지간한 어퍼컷이든 스트라이트 훅이던 다 받아 주려고 했는데. 하긴 나만 나이드나..

 

그나저나 이런 글을 나의 작가방에 오랫동안 쓸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의 삶이

또 다른 많은 어려움을 지금 겪고 있는 이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될 것 같았다. 누구에게 오랫동안 말 못할 고민을 드러내어 같은 세상에 사는 공감을 공유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모든 것들이 때가 따로 있다는 것을 자신의 삶의 몫이 각양각색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살면서 그 많은 일들을 배분하여 적시적소에 각본처럼 구성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바로 내 인생이라는것을 그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나의 시간이라는 것을 고백해본다.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