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핸드폰을 만나던 날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무엇을 맨 처음 보고 만지고 들었던 그 세세한 시발점들이 모두 다 기억이 나면
참 좋겠다. 적어도 올챙이적을 잊어 버린 못된 송아지처럼 뿔난 엉덩이는 없었을테니.
그렇다고 또 어디가서 하소연을 하고 수다를 떨고 또 그렇게 해야 풀어지는 마음은 나이도 잊었나보다 늘 하던 짓은 해야되고 못하면 몸이 근질근질하고 머리는 지끈지끈하니 천상
이 도화지에 또 낙서를 해야 직성이 풀릴려나.
오늘 시아버님이 세 번째 암 수술하는 날이다.
남편과 결혼 한다고 처음 인사드리는 날 난 어이없게 큰 실수를 했다.
지금도 키도 작고 발도 작고 손이 작은 나는 그 어리고 멋모르는 나에게
참외를 다과로 갖고 오셨는데.
울 시어머니도 너무 큰 참외를 두 개를 덜렁 쟁반에 담아 오신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며느리 될 내가 제가 깍아서 드린다고 참외를 들었는데
내 주먹에 두 배나 될 정도의 크기다.
집에서도 덜렁이라고 칠칠치 못 하다고 천방지축이던 그 때인데
시부모 앞이라고 그런 걸 감출 수 있었을까 .
한 번 칼질에 그 큰 참외가 아버님 무릎으로 데굴데굴 굴러서 무픞에 턱 걸렸다.
아버님의 눈에 들어서 허락을 받아 낼 처지인 내가 그렇게 황당한 일을 저질렀는데
" 야 야 참외가 너무 크니 반토막내라! 그래야 굴르지 않지?"
나도 어리뻥뻥한 얼굴로 반을 짜르려니 칼이 작다.옆에서 보다 못한 남편이 칼을 달라고 하자 나도 그만 얼른 주고 말았다.나중에 아버님이 그러시더란다.
" 야야 그 애가 너무 약해보이는 디 애는 낳겄냐?" 하시면서도 남편에게 애한테 잘하라고
한 마디만 하셨단다. 아버님이 걱정데로 진짜 나는 큰 애 낳다가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을 뻔한 며느리였었다. 애는 뱃속에 들어 앉아서 좀체 돌지도 않고 나중에 산통은 다 겪고 난 후 골반이 벌어지지 않는 통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아버님의 예리한 눈매가 적중한 것이다. 그 때 그 아이는 이제 열여덟이나 되었다.
고부간의 갈등에 아마 가장 큰 피해자는 아바님이시다. 울 시집에 아들이 넷이나 되는데.
이젠 남은 며느리는 달랑 나 혼자다. 큰 며느리이고 맏며느리에다 지금은 외며느리가 되버린 것이다. 동서들이 떠난 관계로 나 혼자 이러든 저러든 누가 뭐라고 참견도 받을 처지가 아닌 외며느리가 되어 아버지 병상을 보니 어처구니도 없고 마음이 왜 이리 서글픈지 그냥 가슴이 먹먹하다. 이젠 어머니도 나와 같은 동병상련을 겪고 있는 중이시다.
세상에 좋은 끝은 없어도 나쁜 끝은 반드시 온다더니 우리 집안보고 그런 말 나왔는지 모른다. 나만 각별하게 이뻐하시거나 누구만 집중적으로 편애를 극히 싫어하시고 그렇게 말리시던 시아버님의 노력도 무시되어 결국 어머니는 셋이나 되는 며느리들이 떠나게 만들었다. 남은 가족들은 모두 처음엔 어리벙벙 했겠지만 어미에비자리는 따로 있는 가정을 지키지 못했으니 손자들에게 나에겐 조카들에게 면목이 없다.
결국 그 실수 투성이고 덜렁한 큰 며느리가 어머니에게 한 말씀 드렷다.
" 엄니..요즘 효자는 지 처자식 잘 지키고 가정지켜 사는 것만으로도 큰 효자라네요"
있을 때 못 지키는 게 어디 한 두가지인가? 새록새록 세월지나 흐르니 나도 이런 말씀 괜히 드렸나 싶었다. 당신이 더욱 뼈저리게 느끼셨을 간절함 아니었던가?
에휴~~ 모지라면 모지란데로 살다가 가도 아무 탈 없을 내 인생이다.
누군들 이렇게 살고 싶어 그렇게 아웅다웅 싸웠을까 싶다.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알아도 다 모르니 또 한 번 모른 착 해주고
이런게 사는 방법의 기술인가 보다. 적어도 나아닌 타자에게 가슴에 깊게 패인 아픔이 되기 전의 상황일 것이다.
병문안 가는 길에 내 손안에서 알맞게 깍을 수 있는 참외를 사가야 겠다.
아버님이 침대에 계시니 구르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