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보험에 가입했는데 증권과 약관을 잊어 버렷다고
다시 재발급한다고 우리 사무실에 찾아오던 그 여자.
처음 사무실 문을 열어 대번 문을 못 열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저기 계세요.....
들어오시라고 손을 내밀어 잡아 끌어다 겨우 자리에 앉아서 숨쉬는 그 여자를 보고
난 별안간 이거 무슨 문제가 단단히 뭉친 것 같이 보였다.
차를 드릴려고 했더니 막무가내로 거절이다.
말도 한 번 하면 드문 드문 더듬이처럼 생각이 느린건지
한 참후 이 사무실에 온 목적을 애기했다.
다행히 다른 직원들이 모두 외근을 나갔기에 나와 마주보면서
앞머리만 뭉쳐 세어진 흰머리가 적지 않은 나이를 짐작케 했다.
십여년전에 부부형으로 암보험인지 뭔 보험을 들어놓고 돈을 내기는 했는데.
몇 번을 넣었는지. 내용이 뭔지. 그리고 지금 남편이 많이 아프고 해서 이참에 다 알아볼려고 왔단다.
주민번호를 눌러보니 암보험이고 오래전에 가입했기에 배당금도 있고 이미 납기가 만기가 되어 보험료는 내지 않아도 됩니다. 했더니 대뜸 그거 해약할 수 있냐고 묻는다.
왜그러냐고 물으니 남편이 일을 못하고 저렇게 시름시름 아프고 아이들이 대학 학비도 대기 빠듯하고 그래서 그런단다.
말은 그렇게 하시는데 내가 듣기엔 그냥 핑계인 것 같은 또 다른 사정이 있을 것 같았다.
해약은 오늘이라도 당장 가능하지만, 이건 적금과는 전혀 다른 돈입니다.
남편이 아프시다면 무슨 병이냐고 물으니. 딱히 무슨 병명이 없이 그렇게 몸이 약해서 맨날 시름 시름한단다.
난 오래된 고객들에게 회사차원에서 무료 종합건강검진을 서비스 받고, 건강검진 결과를 보고 해약을 하던 다른 방법을 알아볼 수도 있다고 권유했다.
그렇게 부부가 나란히 모 종합병원에서 만났다.
남편은 매우 마르고 거기다 키가 커 더욱 길게 보였다.
순서가 복잡하게 보일 수 있지만 간호사가 길 안내를 잘 해줄거라고 안심을 시키고
그 여자를 보았다. 전에 왔을 때보다 더욱 얼굴이 안됐다.
사느라 고생한 얼굴이다.
무엇이 저렇게 시달리게 했기에 굽은 등줄기에 후줄거림이 매달렸다.
내내 나와 오후를 같이 보냈건만 어디를 보는지 말이 없다.
괜히 나만 말 걸기도 미안하다.
나도 수다를 좋아 하는데... 이런때는 별로 소용이 없다.
녹차캔을 들이 밀었다. 그여자는 손사래를 친다. 안먹는다고 거절하지만 난 캔뚜껑을 엄지로 꾸욱 눌렀다. 마음이라도 차 한잔에 풀으라고.
겨우 한마디로 시작하였다.
남편이 두 집 살림을 했단다. 자기는 둘째고 나중에 보니 첫째 본처가 있더란다.
그 형님이 얼마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자기는 옛날에 일자무식이라고 배우지 못하고 갖지못한 것이 당연하게 여겼는데.
남편은 그렇게 사는 나를 자꾸 덮어주고 보호해주고 그랬단다.
그런데 지금은 남편을 병에 돈에 자식에 보내줘야 된단다.
법이라면 당연한 것인데, 사람정이 그렇게 무우 자르듯이 자리가 나냐고...
본처는 없는데, 자식들이 성화란다. 이젠 어머니가 없으니 다시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보험회사에선 우선 수령할 수 있는 사람이 배우자라고.
지금은 그 자식들을 법원에서 만난단다.
아직 호적에선 부부로 되어 있나 보군요?
그게 나에겐 별 의미가 없어유... 나라에서 아무리 관리한다고 해도 그런게 시시콜콜 상관하자는게 영 싫거던...
법원에서 자식을 만나 돌아오는 날이면 저렇게 맥없이 더 아픈데.
내가 환장 할 노릇이지. 그 놈의 돈이 사람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거여.
그래서 내가 보험을 해약 할려고 햇던거여.
형님도 죽어서 못 가져간 돈을 뭐하러 자식들 싸움 붙여 놔?
시방 내가 밥 세끼를 못 먹는 거도 아니고,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해가면서 살 나이도 아니고. 죄라면 내가 둘째인지 모르고 산 게지...
한 참을 넋두리 반 신세한탄을 듣고보니 나도 멍하다.
멍청한 두여자가 병원복도에서 한 참을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한가지 수는 있긴 있는디..
그 여자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 그냥 다아 가져가라고 해요."
"그래도 되나?"
그럼요... 보험금을 안받겠다고 본인 의사만 전달되고 그러면 법원에서 어떤 판결 나도
상관 없지요..어차피 법정 상속인들이라면 자식들도 포함되어 있는데요...
남편이 돌아왔다. 자초지종을 애기해보니 거절하면 그렇게 시달리지 않을 거라고 설명을 듣던 남편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렇게 헤어진 후 몇 칠 지나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
별다른 소견이 없었다. 단지 간수치가 조금 높다는 소견이 첨부되었다.
난 얼른 그 여자네집에 전화를 했다.
전화 목소리는 컸다. 내용을 애기하고 결과표는 우편으로 보내드린다고 했다.
" 저기요? 그 때 고마웠어요... 덕분에 자식들과 화해를 했어요..난 한푼도 안받을테니 제발 법원에서 만나지말자고 했더니 자식들이 아버지를 찾아와 잘못했다고 빌고 갔어요...
세상에 이런일이 있을 줄은 내 생전 꿈도 못꿨는데. 아무렇지 않아요. 이젠 남편도 밥 잘먹고 잘 지내고 있어요.. 정말 고마워요..."
사람 사는게 별 수 없다. 그런 말을 들으니 나도 조금은 살 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