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초라해서 더욱 정다운 나의 시골집
나에게는 주말마다 찾아가는 시골집이 있다.
아파트에 사는 내가 시골집이 있다고 하면, 주변사람들은, “아, 별장이군요!” 한다.
“별장이 아니라. 그냥 작은 오두막집...”
나는 서둘러, 그들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을 “별장”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나의 시골집을 누누이 설명한다. 재래식 화장실, 무너진 토담, 부뚜막, 황토집...
그러면 그들의 상상력은 다시 발동된다. 아하, 웰빙의 상징인, 황토집이구나!
이제 그들은 나의 시골집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본격적으로 졸라댄다.
몇 번이나 씁쓸한 경험을 한 나는 마지못해 한마디 더 다짐한다.
“우리 집은 정말 시골집인데...”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이, 바로 그런 데 얘요!” 그들은 단언한다.
그들이 꿈꾸는 전원주택은, 뒤로는 나지막한 산, 앞에는 졸졸졸 흐르는 맑은 시냇물, 그림 같은 언덕위의 하얀 집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시골집”이라고 아무리 강조를 해도 그들은 “전원일기”에 나오는 가짜(?) 시골집들을 연상할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극성스레 달라붙는 파리, 모기, 외양간 냄새가 없는 TV화면상의 집들. 삶이 TV화면처럼 일차원으로 펼쳐지는 곳. 나는 “정말 시골집”에 가 보고 싶다는 그들의 말에 또 속아서 그들을 나의 시골집으로 초대한다. 아니 속은 것은 어쩌면 그들인지도 모르겠다. 매 번, 기대에 완전히 어긋난 표정이 역력하다.
실망이 가득한 그들은 모기와 파리에 질 겁을 하고, 모기장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온갖 냄새를 풍기며 구운 고기만 먹고는 정말 서둘러, 도시로 돌아간다.
그들은 반딧불도, 은하수도, 달빛에 하얗게 피어있는 박꽃에도 눈길하나 주지 않는다.
내가 애써 준비한 식사를 대접 받으며, 누군가가 소유한 훌륭한 전원주택을 안주 삼는 것도, 물론 잊지 않는다. 그래서 내 시골집은 더욱 초라해진다.
그들에게는 내 시골집이 나에게 얼마나 정다운 곳인지 알 바 없다.
내가 소유한 도시의 아파트가 주지 못하는 행복을 내가 이곳에서 흠씬 맛보고 있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에게 내 시골집은 누추하고 불편하고 냄새나는 곳일 뿐이다.
산골, 나의 작은 집
뽀오얀 아지랑이 속
새벽이 동터오면
음매에,
꼬끼오,
멍멍,
가축들의 울음소리가
도시생활에 찌든 나의 마음을 씻어주고
이슬 머금은 풀들은 더욱 싱싱하네.
무너진 돌담 안
작은 마당에
상추랑,
호박이랑,
잡초와 친구 되어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고
이마엔 어느 사이 땀이 배어
어설픈 농부 흉내도 힘이 드네.
지난 봄 처마 밑에서
새끼 낳아 떠났던
작은 산새는 옛 둥지 맴돌며 먹이를 쪼아 먹고
아름다운 호랑나비가
꽃 위에 남실대네.
앙증스런 청개구리 초록 잎에 초록빛 감추고
거미들 솜씨 부려 지은 거미줄에 이슬이 초롱초롱
영롱하게 반짝이네.
풋고추, 호박 송송 썰어 밀전병으로 배를 채우고
저 멀리
도라지꽃,
파아란 벼이삭도
모두 앞마당처럼
먼 산에 대나무는 자랄 대로 자라 숲을 이루었네.
모기도 한철
파리도 한철
외양간 냄새
옆 집 벙어리 아줌마 한데 어울려
중풍에 걸린 아저씨는 여전히 술타령.
하루에 두 번 버스가 들어오고 나면
조용한 마을은 다시 적막해지고
두 마리의 반딧불이 사랑을 나누는
밤하늘엔 은하수가 수를 놓아
산골이라 번개는 더욱 번개답고
나는 점점 더 흙과 닮아가네.
내 마음 텅 비어져 흙과 닮아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