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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터 ♬


BY 플러스 2009-12-28

3 년 전주일이면 가야 할 교회를 찾기 위해 서너 주 가량 몇 군데의 교회에서 번갈아 가며 예배를 드렸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6,7년간 타국에서 보낸 후라 오히려 한국적인 문화가 생소하게 느껴졌던 것인지 아니면 이 거리의 분위기 자체가 내게는 익숙하지 못한 것이었던지이질적인 문화 환경 속에 있는 것 같은 부적응을 한 동안 겪어야 했던 때였습니다.

 

  서너 군데의 교회를 다녀 본 후 느낀 것을 남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 여기는 교회마다 예배가 몇 부씩 시간대 별로 있을 뿐 아니라 각 교회마다 예배 시작하는 시각도 다르고, 목사님들도 개성이 뚜렷하게 달라 보이고 같은 교회라도 말씀을 전하는 분들이 여러 명 있으신 듯 하니  사람들이 자기 편한 대로  맘에 드는 대로 쇼핑하듯 다양하게 예배를 선택하여 드릴 수 있게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사실 그것은비판적인 시각이 좀 들어 있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 수요일 밤.  즈음 남편의 고민거리를 놓고 함께 무거운 마음이 들던 중그 시간 즈음이면  밤의 안온한 정취 속에 잠겨 있을 출석 교회의 풍경이  떠올라 그 곳에 잠시 가자고 했습니다

 

번잡한 도로들을 지나 푸른 녹지의 공원을 끼고 주택가가 펼쳐진 작은 도로로 접어 들었습니다.   주일이면 사람들과 차량으로 복잡해지는 것을 두고 교회 공동체를 향해 토로하는 주민들의 고충이 충분히 이해가 갈 만큼바로  십 미터 거리 밖 도심으로부터 벗어나 딴 세상처럼 훌쩍 떨어진 주택가는 고요함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잘 정돈된 번듯한 주택들을 지나  나무들이 우거진 나즈막한 산허리 아래 쪽 예배터로 오르는 넓고 높다란 층계를 걸어 올라갔습니다맑고 신선한 밤공기는 예배당 속에서 올려지는 수요 예배의 분위기로 인한 것인지 정갈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고요한 정취 속에서 고민거리도 잠시 잊은 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지난 삼 년 간 나로 하여금 이 예배터를 줄곧 찾아 오도록 해 온 것은 이 예배터가 위치한  '장소'가 가지고 있는 고요한 분위기였던 것은 아닐까하는..

 

  물론 한 분의 목자를 통해 주님이 잡으셨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긴 하지만 말입니다

 

  요즈음은 가끔 예배 가운데에서 마치 나 자신 실리를 따지듯, 예배 중 나 자신이 느끼고 싶은 귀한 무엇을 과연 얻고는 있는지 또 그런 경우가 있다면  무엇을 통해서였던가를 따져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아마 예배를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는 아닐 것이나 그 만큼 예배를 두고 내 안에 무언가 고민이 있어 왔던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보통 그것은 예배 시작 전에 있는 찬양을 통해서임을 알게 됩니다선택되어진 곡조들 중의 어느 한 곡조의 가락과 가사가 마음을 움직일 때에또 가끔은 찬양을 마친 인도자가 마음의 깊은 움직임 가운데에서 드리는 짧은 기도의 구절 한 토막 속에서 나 자신 또한 마음이 건조해지지 않는 무엇을 얻게 됩니다.   

 

또 가끔은 말씀 증거 전에 들려주는 성경구절 속에서 그 '귀한' 조각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물론 그런 때에는 설교의 내용이 어떠하든 찬양이나 특송이 어떠했든 전혀 개의치 않게 됩니다그것만으로도 생각할 거리로 넘치도록 충분한 복된 주일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어제는 그 짧은 '해갈' 나이가 많은 한 자매의 간증 순서에서 잠시 느꼈습니다나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게 되는 문제를 다른 사람을 통해 들으며 마음으로 한 사람을 잠시 보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드문드문 찾게 되는 그런 짧은 해갈들은,  다른 건조함들을 참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예배란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나아가는 것일 뿐 아니라,  주님 안에서 사람의 마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라보며 사람에 대한 '진정성'을 나누고 회복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제 예배 중 잠시 들기도 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온 거리는 드문드문 눈발이 흩날렸었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걷는 동안 예배와 관련하여,  또 지난 밤  꿈이 의미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여기게 되며  한 가지 생각이 정리되듯 지나갔습니다.

 

  진리의 길 위에서 살아가고자 결단한 우리들은 주님의 거룩하심으로 새롭게 옷입었다함을 받았으면서도이전의 더럽고 누추한 죄악의 잔상같은 누더기 조각들을 온전히 내어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옷' 위에 자꾸만 덧입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습관과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큰 자이든 작은 자이든, 기회를 아무리 여러 번 주고 깨닫게 하셔도 여전히 우리의 추함을 곳곳에서 드러내 놓고야 마는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그런 우리들이기에 귀해 보이든 그렇지 않든 그저 사람일 뿐임을 겸허함 가운데에서 받아들이게 될 뿐 아니라,  그런 사람에 불과한 것이 우리가 아는 바 사람들이기에 사람을 높이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실족치 않을 수 있는 것이며.. 

 

냉정한 비판의 시각으로 보면 부정적일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임에도,  그 어리석고  가진 것이 쉽게 바닥이 나 버리는 얄팍한  우리를 통해서도  사람을 구원케 하시는 섭리를 통해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여주실 뿐 아니라, 그런 자들이기에 오히려 더욱 서로가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키워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 가운데에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씁쓸함을 덮어주기라도 하듯, 창 밖의 세상은 어제 내린 많은 눈으로 온통 하얗습니다

 

   쌓인 눈을 보고 있자니 올해도 먼저 크리스마스 축하 메일을 보내 오신 한 목자께철없는 아이처럼 오랫동안 보지 못한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답신 속에서 했던 것이 상기됩니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지난 후 내린 눈임에도 창 밖의 하얀 세상은 마치 올해 화이트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것 같은 기쁨을 느끼게 합니다.  메일만으로도 느껴지던 반가움이 눈과 함께 다시 떠올라서일 것입니다

 

   답신에 쓴 우리 가족의 짤막한 근황이야기에  다시 보내 오신 메일 속에 담긴 목자의 마음을 돌아보면 마음이 뭉클해져옴을 느낍니다.  오랜 시간 함께 보낸 것도 아니고재력이든 힘이든  특별한 대우를 받을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우리 가족임에도 그 짧은 만남을 소중하게 여겨 주시며  염려와 사랑 그리고 축복을 가득 담아 보내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그 글 안에서, 그 성품 안에서..  예수님을 닮은 겸손과 사랑을 보며..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복들 가운데 하나를 깊이 헤아려 보게 합니다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주저함 대신 용기를 가지게 하는 힘을, 목자가 전해 주신 말씀들 속에서 느끼게 됩니다.

 

   몇 달 후의 일은 차치하고라도  당장 다음 주일부터 아이가 준비하고 싶어하는 시험이 있어 주일의 어떤 시간대를 비워두어야 하고그렇다고 스크린을 통해 예배를 드리는 것은 원하지 않기 때문에당분간 예배 장소를 옮기게 될 것 같습니다.   예배터와 예배시간이 다양해서 선택의 폭이 넓은 곳에서 사는 것의 편리한 점을 이 시점에서 보게 되는군요.. 

 

  그러나 사실은 이것 또한 주님이, 있어야 할 시간에 있을 곳을 정해주신 것일 수 있다고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