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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낭만적인 날1-꽁트-


BY 플러스 2008-03-04

<부제--- 미드 나잇 블루>

 

 

 

 

"엄마눈이 내려요."

 

"그래?"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서며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하는 딸 아이의 말에도 다영은 창 밖을 내다 볼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눈이 무지 많이 온다니까요함박눈이에요. "

 

그제서야 다영이 거실 쪽으로 다가가 버티칼을 슬쩍 들어 밖을 내다 보았다큰 송이의 눈이 성기게 내려오고 있었다.

 

'이 정도를 가지고 함박눈이라니얘가 아직 진짜 함박눈을 못 보았군.'

 

다영이 속으로 생각하며  창가에서 돌아섰다하긴 다영의 딸은 그녀가 어린 시절 보았던 큰 눈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을 것이었다더군다나  눈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닌 외국에서  그녀의 가족은 오랜 세월을 보냈었던 것이다이제 한국에 돌아 온 지 일 년그러니 딸에게는 마치 처음 보는 눈 만큼이나 반가울 것이었다.

 

금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전등을 켜며 다시 창밖을 살펴 본 다영의 눈에  훨씬 짙어진 눈발이 어둑한 대기 속을 가로지르며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버티칼을 옆으로 치켜 든 다영의  손이  이번에는 곧바로  내려오지 않았다.

 

악보가 켜켜로 꽂힌 작은 책장으로 다가간 그녀의 손은  평소에는 손이 닿지 않는 구석으로 향했다그녀의 손에 잡힌 것은  가장자리가 다 닳아버린  낡은 하늘색 피스 한 장이었다

 

'따라라라 라빰빠....  따라라라 라.

 따라라라 라빰빠...   따라라라 라.'  하는 전주로 시작되는 노래는  ,

 

'I see the lonely road that leads so far away,...' 하는 부드러운 남자가수의 목소리로 연결되며  감미롭게  노래가  되어 흐르는 듯다영의  손가락을  빌려  피아노 선율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노래가 끝난 후에도 다영은 피아노 의자 위에 잠시 더 머물러 앉아 그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 같은 밤과 참 잘 어울리는 노래야.' 라고 생각하는 그녀에게, 그녀가  까마득한 예전에  낭만적이라고 여겼던 것 같은  '어떤  느낌과 분위기'  조금씩 짙어지며 덮여오고 있었다창 밖으로 점점 깊어지는 밤 기운처럼..

 

"삐리리"

 

전화벨이 울렸다남편일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또 늦는다는 전화일 것이었다지난 수 개월 간  프로젝트  몇 개가 쉴 사이 없이 계속되고 있는 터였다

 

"자기야,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저 오늘 애인 만나서 데이트할까 했어요."

 

늦는다는 남편의 말에 뜬금없이 둘러대듯 하는 다영의 말에는  아이같은 바람을 슬쩍 내비치는 투정이 담겨 있었다.

 

"???  되도록 일찍 갈께."

 

'도무지 말 한 번 멋있게 하는 법이 없어.'

 

수화기를 내려 놓는 다영이 생각했다이미 익숙한 지 오래지만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도  오늘 같은 날 쯤은  말 한 마디라도  '낭만적'으로 해 줄 수 있었어야 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사랑스러운 말이 남편으로부터 나오게 하려면 어떤 식으로  다영이 말했어야 했는지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다르지 않은가..

 

밤은 점점 깊어 가는데눈은 도무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짙어져  창 밖은  온통 하늘에서 땅을 향해 내리 꽂히는  눈발로  가득했다까만 밤 속과  그치지 않고  내리 꽂히는 하얀 눈발의  극명하게 드러나는 색감과 움직임은  다영의 마음까지 함께 움직이게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듯 했다.  

 

밤은  벌써 자정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하루만 참으면 돼하루만 참으면... 휴가를 가는 거야..'

 

거의 십 여 년에 가까운 타국에서의  생활은  그녀로 하여금  번잡한 대도시에서의 삶에 쉽게 지치게 하는 지도 몰랐다그녀는  하루 뒤에 있을  휴가여행을  벌써  몇 달 째 기다려왔던 것이다.

 

'하루만 있으면하루만 있으면 제주도로 여행을 가는 거야..'

 

제주도그랬다그녀의 가족은 제주도로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순간 목적지까지 떠올렸던 것은  실수였던 지도 몰랐다이 십 년 만에  가 보게 될그녀에게  꿈처럼 남아 있는  한라산이 있는 제주도를  바라는  마음은  그녀의  참을성을  오히려  바닥나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다영은  재빨리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