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텔레비전 방송을 스쳐 지나가면서 잠시 본, 한 목사님의 고백이 지나갑니다.
처음 보는 얼굴의 그 목사님은 자신의 한계에 대해 스스로 가지는 자괴감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돌아 볼 때에 스스로 강단에 설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깨닫게 되는 애통을 느낀다는 것, 그러나 다시 주일이 돌아오면 주님을 의지하여 용기를 내어 강단에 서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참된 도리, 이상, 그리고 진리에 대해 , 그리고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져야 부분들, 인간으로서의 마땅한 ‘바름’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망설이게 되는 경우가, 바로 자신이 이야기하는 바 대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를 자신할 수 없다는 점에 있지 않나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내 안을 아무리 들여다 봐야 선한 것은 조금도 없는' 인간들일 뿐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진리이신 분이 스스로를, 즉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자신이 창조한 세계 안으로 들어오신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인 듯 합니다. 그 분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진리를 증거하고 이야기할 ‘자격’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있지 않을 테니까요.
앞서 말한 망설임은 내게도 있는 것입니다. 화면에서 지나가는 영상 속의 ‘고백’을 두고 나 자신이 떠오른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또, 화면 속의 목자의 말처럼 나 역시 주님을 의지하여 용기를 내곤 하는 것이겠지요.
며칠 전 주일이었습니다. 거리상으로는 짧은 거리이지만 교통량이 적지 않은 곳이라 지체되는 시간이 적지 않은 예배처까지의 길이, 그 날은 다른 주일에 비해 원활하게 소통되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여러 번 걸렸어야 했을 교통 신호도 '계속 가라'는 초록 신호 일색이었습니다. 이렇게 빨리 예배처에 도착해야 할 일이 있기라도 한 걸까 하는 생각이 잠시 지나갔습니다.
예배가 이미 시작되어 맨 끝 쪽의 문만 열고 들어갈 수 있을 시각에 집에서 출발했던 것인데, 도착하고 보니 아직 예배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중앙의 문으로 들어서긴 했지만, 예배당에는 이미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앉을 자리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구석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도중에, 약간 옆 쪽 뒷 줄 두 번째 의자 안 쪽으로 빈 공간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의 다른 의자들은 보조 의자를 포함해 모두 차 있었으므로, 나름 좋은 위치인 그 곳에 넉넉해 보이는 공간이 보인다는 것이 의외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의자의 통로 쪽 끝에,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과 전혀 다른 차림을 하고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습니다.
촌스러운 원색이라고 할 만한 짙은 원색이 마구 배열된 듯한 옷은 낡고 더러워 보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하는 남편의 말에 돌아보는 남자의 얼굴 또한 고르지 못한 수염이 듬성듬성 난 얼굴에 빗지 않은 지 오래된 것 같아 보이는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뻗쳐 있었습니다.
잘 정돈되고 깔끔하게 또 조금은 고급스럽게도 차려 입은 다른 교인들 속에서, 그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의 표현에 따르면 '걸인'처럼 보이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안 쪽의 빈 공간 안으로 쑥 들어가며 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앞쪽이 훤히 보이는 통로 쪽의 좋은 자리는 나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잠시 후, 두 여자가 우리의 옆자리를 지나가다가 한 여자가 우리 부부 옆 쪽으로 공간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고 내게 자리가 있는 지 물어왔습니다.
나 자신이 의외의 공간에 자리잡고 앉게 된 행운을 그녀 또한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반가움으로, 나는 두 사람이 더 앉을 자리가 있음을 이야기했고 그녀 역시 기뻐하며 일행인 다른 여자를 불렀습니다.
그렇게 우리 부부의 안쪽 빈 공간으로 기뻐하며 들어간 두 여자가 불쾌한 얼굴로 다시 나온 것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녀들은 코를 막고 얼굴을 찡그린 채 뒤쪽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앉은 자리에까지 악취가 풍겨왔습니다.
예배는 순서에 따라 계속 진행되어지고 있었지만, 옆 쪽에 앉은 남자로부터 완전히 관심을 돌리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회중이 모두 찬양하는 순서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사람들을 뚫고 튀어나왔습니다. 박자도 음정도 전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위 아래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남자의 거칠고 투박한 찬양은 노래라기 보다는 ‘구르릉’거리는 괴성같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옆 쪽의 몇몇 사람들이 그 부조화의 소리 쪽을 향해 눈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예배처에 예배를 드러러 온 사람이긴 한 것일까. 혹, 교회란 데가 어떤 곳인지 보러 온 사람인 것일까 하는 호기심은 가끔씩 나 또한 그 남자를 쳐다 보게 하였습니다.
앞에 선 인도자의 지시에 따라 교인들이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남자를 향해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보였고, 남자가 조심스럽고 부끄럽기라도 한 듯 인사를 받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 태도 속에서 보이는 온순함에 마음이 좀 놓였습니다.
성가대의 찬양 중 다시 잠시 바라 본 남자는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말씀 중에 간혹 조는 사람은 보았지만, 고운 모습을 하고 나온 사람들이 무대에 서서 아름답게 찬양하는 중에 조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으므로, 남자가 남은 예배 시간을 어찌 보낼 지는 빤해 보였습니다.
더군다나 그 날의 말씀은 위성화면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때에는 보통 집중력이 떨어지게 마련인 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가져간 신앙서적의 목차를 들여다 보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시 남자에게로 눈길이 갔습니다.
의외였습니다. 그는 전혀 졸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몸을 앞으로 바짝 당긴 자세로 화면의 영상과 말씀에 온 주의를 다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들판에 선 사냥꾼이 짐승의 낌새를 알아채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집중한 채, 남자의 눈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좀 전의 그 남자처럼 보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주변에 앉은 다른 어떤 사람들과도 달라 보였습니다.
설교 말씀이 끝나고 다시 찬양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튀었습니다. 아까 보다도 오히려 더 커진 목소리는 이제 사람들의 찌푸린 눈길이 이 곳 저 곳에서 그 쪽을 향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제멋대로인 음정과 박자로 ‘열심히’ 찬양하는 남자를, 나는 이제는 미소와 함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린 문이지만, 자신과 비슷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 속에 선뜻 발을 들여놓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또 자신을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임도 분명 알고 있을 텐데, 용기 있게 그 문 안에 들어와 앉아 있던 남자는, 그 처소에 모인 어떤 사람 보다도 말씀과 예배를 ‘누리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