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예배처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지 한 달 쯤 지난 어느 주일, 예배처를 빠져 나오면서 나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주일이면 얼굴을 마주 보게 되는 누군가가 내 글을 읽게 되는 일이, 확률적으로 볼 때에 상당히 희박해 보이는 우연 같은 일이, 그러나 벌써 내게 두 번 일어난 일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제 더 이상 놀라지 않겠다라고.
그렇습니다. 절대자이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우연같은 일들, 그 몇 십만 분의 일 밖에 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얽히고 설키며 나에게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변화와 성장을 위한 과정이 되도록 섭리하셨던 주님 앞에서, 나는 이제 손도 발도, 그리고 사람 앞에서 낯뜨거워지는 마음 마저도 내려 놓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변화..라고 말했습니다. 그 변화에 관계된 것들이 지나간 글들 속에서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감지되기도 하겠지만, 실상 내가 깨닫는 변화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이어서 일일이 적지 않은 부분들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오히려 글로 쓰여진 부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도 여깁니다.
그런 점을 돌아볼 때에, 주님께 실상 우리로서는 사소하다고 여기며 그저 넘어가게 되는 부분 마저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란 없으며, 그 모든 것을 통해 한 가지 일을 이루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하나를 통하여 동시에 갖가지 일들을 여러 사람들 안에서 이루시기도 한다는 것을 다시 살펴 보게 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사람을 신뢰하기가 참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그것이 처음에 특별한 만남이 되도록 주님이 손을 써 놓으신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마음에 상처가 되었던 한 ‘사건’을 두고, 그 한 사람의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있어서 내게 시험의 기간이 된 두어 주.
그 시간을 작은 고통 가운데에서도 어느 부분은 신뢰를 잃지 않고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그에 앞서 일 주일 전에 이해하기 어려운 방향에서 일어난 자매간의 작은 마찰을 두고, 사람의 인간성의 문제가 아닌 ‘서로 다름’으로 비롯되는 문제로 방향을 바꾸어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으로 인함일 것입니다.
여동생과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향의 다름 뿐 아니라,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고 또 살았다는 것, 즉 타문화 속에서 형성되어진 '다름'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어떤 특정한 문제를 두고도 상당히 다른 태도를 가지게 하며, 또 그에 대한 반응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일 때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주는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간 잊고 지냈던 육체의 약함 가운데에서, 나 자신이라는 육체에 대해 가진 자연스런 본능과도 같은 집착 마저 가만히 바라보는 가운데에서 낮아지는 마음 만큼이나 더욱 평안해지는 나 자신을 봅니다.
오히려 약한 가운데 가지는 그 평안함은, 이웃에 대하여 오히려 더욱 열린 마음으로 자질구레한 이기심이 보이더라도 웃음으로 받아들여 줄 만큼 작지만 넓은 사랑의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을 봅니다.
육신이 약해질 때에 사랑을 더 잘 알게 될 때도 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이전에는 그런 때에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작은 원망이나 좌절감을 느끼거나 스스로 타인에 대하여 보호하려는 것처럼 방어의 벽을 쌓게 됨을 느끼곤 한 적도 꽤 있었으니까요.
잠시 한 동영상을 통해, 역시 육신의 약해짐 속에서 선 누군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한 지체인 우리가 서로 주고 받고 있는 영향력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변화라는 것은 조용한 가운데에 있지만 늘 흐르는 물처럼 우리 주변에 있는 힘인 모양입니다.
내게 주어지고 있는 영향력. 그것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봅니다. 겨우내 쌓여진 눈이 얼음이 되어 쌓인 산 골짜기에 조금씩 봄 햇살이 몰래몰래 찾아들 듯, 내 안에 형성되어진 자아의 어느 부분으로 비쳐든 햇살 한 줄기가, 때로 내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서로 다름’을 두고도 마음이 열리도록, 그것이 나를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힘이 되고 양분이 되어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