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는 인가 하나 보이지 않는 외진 곳, 산들로 둘러 싸인 들판 어귀에 일행을 내려 놓고는 먼지를 자욱히 남기며 왔던 길로 돌아가 버렸다.
"그렇다니까. 경기도에서는 세 번 째로 높은 산이지. 천 이백 미터 조금 안 되지, 아마. "
"어머, 그런 산엘 어떻게 올라가요? "
"하하. 정상까지 올라갈 게 아니야. 중간 부근에서 다른 코스를 타고 내려올 거야. "
"몇 시간이나 걸린다고 그랬죠? "
"2시간, 2시간 해서 4시간 잡으면 될 거 같애. "
"4시간이라고요? 큰일 났다."
앞 쪽에서 선배들과 신입 여학생들이 병아리처럼 왁자지껄하게 주고 받는 목소리를 들으며 영선은 자연스럽게 늘어선 줄을 따라 산 입구로 향하는 들판으로 들어섰다. 비스듬하게 높아지는 야트막한 둔덕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푸른 잡초들로 무성했다. 그 잡초들 사이로 들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뒷사람을 따라 발을 옮기던 영선의 귀에 정인의 목소리가 높게 들려왔다.
"이 꽃 이름 아시는 분 계세요? "
누군가가 대답하는 소리와 이어지는 웃음 띤 대화소리들이 분명치 않게 앞 쪽에서 들려왔다.
" 정말 신기하다. 이 꽃은요? 이 꽃 이름은 뭐예요? "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는 달리 정인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들려왔다. 다시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와 웃어 젖히는 소리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에 이어 정인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맞이꽃? 달맞이꽃이라구요? 이게 그 달맞이꽃이라구요? "
멈춰 선 정인에게로 점점 가까와진 영선의 귀에 한 선배의 목소리가 더 들려왔다.
"그렇다지. 낮 동안은 꽃잎을 접고 있다가 밤이 되어 달님이 떠오르면 피어오른다는... "
"세상에, 이렇게 예쁠 수가.... "
정인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제는 정인의 바로 옆에까지 다가 온 영선이 멈춰섰다. 주변에는 몇 가지 종류의 꽃들이 있었다.
영선이 궁금증을 느끼며 정인에게 물었다.
"어떤 꽃이 달맞이꽃이라는 거야? "
정인이 영선을 돌아보았다. 그 눈은 영선이 그제껏 보아 온 정인의 눈과는 달랐다. 햇살이 들지 않는 깊은 우물처럼 깊고 서늘한 눈, 빛이 느껴지지 않는 검은 어두움을 담고 있던 눈. 그 눈은 이제 여전히 검고 깊으나 마치 꿈꾸는 듯한 소녀의 몽상 같은 것이 느껴졌다.
잠시 멈추어 있던 정인의 눈은 곧 다시 꽃을 향한 채로 영선을 향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 바로 이 꽃이야. 여기 네 개의 하트모양을 한 노란 꽃잎을 접고 있는 꽃이 보이지? 이 꽃이 바로 달맞이꽃이래."
정인이 가리키는 꽃은 영선이 풀숲을 따라오며 이미 본 '노란 꽃들' 중의 하나였다.
" 정말 예쁘지 않니? 생각해 봐. 낮이면 아무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꽃잎을 접고 있다가 밤이 되면, 동산 위로 달님이 떠오르면, 마치 그리운 님이라도 맞이하듯 예쁜 꽃잎을 활짝 펴고 피어오른다는 거야. "
" 이 색깔도 이 꽃이 달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달님의 색을 가지게 된 걸 거야. "
정인은 숨쉴 틈도 없이 선배가 좀 전에 했던 말에,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넣어서 쏟아놓는 것이었다. 들뜬 사춘기 소녀처럼 꿈에 젖은 듯 늘어 놓는 정인의 말을 들으며 영선은, 방금 전까지는 '노란 꽃'일 뿐이었으나 새롭게 '달을 사랑하는' 특별한 꽃으로 다가 오며 다시 보여지는 꽃을, 정인의 곁에 서서 함께 바라보았다.
"이름이 특이하다. "
영선이 자신에게 떠오르는 생각 뒤에 덧붙이듯 말했다.
" 그렇지? "
자신의 말을 끝내고는 아무 말 없이 꽃들만 바라보던 정인이 말했다.
" 이름이란 특별한 거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와 같던 꽃이라도 누군가가 이름을 붙여주면 그 때는 독특하고 특별한, 때로는 유일한 존재가 되는 거지. "
영선이 자신의 생각이라도 들킨 듯 흠칫거렸다.
" 우리 말이야. 꽃들에게 이름 붙여주기 할까? "
정인의 제의는 영선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 이 꽃들 말이야. 여기에 숱한 들꽃들이 피었어. 누군가가 붙여주어서 자신의 이름이 된 이름들을 가진 꽃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꽃들도 있을 거야. "
" 또... 누군가가 붙여 준 이름이 있는 꽃이면 어때? 우리가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면 되는 거지. "
정인이 당황한 채로 가만히 있는 영선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무어라 대답할지 몰라 하며 잠자코 선 영선을 잠시 바라보던 정인이 갑자기 소리내어 웃었다.
밝았다.
그녀의 웃음은 이제껏 영선이 몇 번 보아왔던 그녀에게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을 것 같던 밝음으로 햇빛 속에서 흐드러지고 있었다. 사랑하는 달님이 떠오르면 활짝 꽃잎을 열고 맞이한다는 황금빛의 달맞이꽃처럼.
영선이 그런 생각을 마치 충격처럼 느끼며 아무 말 없이 정인을 바라볼 때에 다시 정인이 영선을 잡아끌듯 한 꽃에로 이끌었다.
"우리. 이 꽃부터 시작하자. "
정인이 가리키는 곳에는 달맞이꽃보다 키가 작은 풀줄기 사이로 연보랏빛 작은 들꽃이 피어 있었다.
" 뭐라고 이름지으면 좋을까? "
영선을 바라보는 정인의 얼굴은 아이같은 미소를 담고 있었다. 당황한 채로 정인의 말을 내내 듣고만 있던 영선이 겨우 대답했다.
" 글쎄.. "
일행들은 어느 새 모두 그녀들을 앞질러 가고, 영선과 정인만이 남아 있었다.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정인이 자신의 말에 자신이 대답하듯 중얼거렸다.
" 이 보라색 꽃은 홀로 피어있어. 바로 옆에는 여기, 흰색의 꽃들이 몇 송이씩 무리지어 피었는데, 이름도 없이, 홀로... "
" 그래, 바로 그거야"
갑자기 정인의 목소리가 생기로 넘쳤다.
" 이름없는 꽃. "
" '이름없는 꽃'이라고 이름을 짓는 거야. 그렇게 지어서 안 될 거 없지."
정인이 깔깔대듯 밝게 웃었다. 그런 정인에게서 장난끼마저 느껴진다고 생각하며 영선이 정인을 보고 처음으로 함께 웃었다.
그것이 바로 영선이 정인을 처음으로 ' 바라 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