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파아랗게 높습니다. 그 파란 하늘 사이 사이로 둥실 둥실 떠 있는 하얀 구름 덩어리들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이 납니다. 가슴이 뜁니다. 오랫만에 보는 저 높고 파란 하늘과 빛이 날만큼 새하얀 구름송이들 때문일까요.
그저께는 선생님과 레슨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 나는 마침 모짜르트의 악보집은 잊은 채 쇼팽의 악보집만을 들고 나가게 되었습니다. 서정적이고 선율적이라기보다는 캐릭터적인, 넘치는 리듬감과 활력 안에서 쏟아지는 개성적인 쇼팽의 곡 하나를 선생님과 함께 마주 대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곡이었던 때문이었을까, 또는 그 곡이 가지는 특성 때문이었을까, 선생님은 레슨 시간 내내 너무나 기뻐하며 또한 열정적이셨습니다. 선생님 몫의 낡고 오래 된 스타인웨이 피아노 앞에서 일어나셔서, 내가 앉은 역시 낡았으나 스타인웨이만큼은 아닌 뵈젠도르프 피아노 옆 쪽에 서신 채로 펄쩍 펄쩍 뛰다 시피 하며 온 몸으로 한 시간 동안 열정적인 레슨을 하셨습니다. 때로 리듬감을 잘 설명하시느라 춤추는 듯한 모습일 때도 있긴 하지만, 그 날의 선생님은 마치 어린아이나 소년같았습니다. 피아노를 쳐 내려가는 내게 어느 순간 잠시 예전의 어떤 사람들을 보는 듯한 착각이 지나 갈 정도였습니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벌써 4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나와 선생님은 서로 간에 깊은 호의와 애정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를 깊이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내가 가졌던 거부감은 냉정함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또 그것으로 인하여 거리감을 가지게 될 수도 있었을 것이나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스스로의 품위와 존중감을 지켜내고 키워낼 수 있었던, 나로서도 선생님으로서도 좋은 방향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나칠만큼 절제됨을 가진 가운데에서 오히려 인간 대 인간으로서 또 사제간으로서 따뜻한 마음의 오고감은 더욱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생각하게 됩니다.
배움이라는 것, 성장되어간다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니다.
결혼과 함께 그 때까지 서 있었던 방향에서 돌아서서 전혀 다른 삶 안에서 전혀 다른 세계 안에만 묻혀서 살아 온 듯한 세월이 생각해보면, 꽤 긴 셈입니다. 그 삶은 이전의 생각의 방향과는 어찌나 다른 지, 그 이전의 내가 사고하고 알고자 했던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인 듯 느껴질만큼 생활 안에 밀착되어진 하루 하루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십 년을 훌쩍 넘은 세월 후인 지금, 그 세월을 포물선을 그리듯 되돌아 그 이전의 내가 생각 속에서 맞닥뜨려왔었던 시간들 안으로 잠시 돌려봅니다. 그 시절에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 또한 생각해 봅니다.
칸트의 실천이성 비판 중의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도덕률에 관한 구절을 자주 읊곤 하시던, 그 연세에도 여전히 맑은 얼굴과 맑은 눈을 가지고 계시던 노교수님, 순진한 사람만이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임을 열정적으로 말씀하시던 역시 나이 많으신 그러나 젊은이같은 열정을 언제나 뿜어 내시던 교수님, 그리고 더욱 가깝게는 음악에의 세계로 깊이 초대해주고 싶어하던 친구, 밀밭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친구 그리고 더 떠오르는 몇 사람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은 자신 안에 내재되어진 아름다움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에의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건축과 미학이 가지는 아름다움의 세계에로 이끌어 주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으며, 내게 도전의 정신을 가르쳐 주고자 했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내게 이성들이었지만, 그 이성임을 뛰어넘은 나의 선배들이자 친구들이며 스승이기도 한 사람들이었음을 잠시 생각해 봅니다.
이성이라는 점을 들어 관계의 한계를 늘 지워야한다면, 우리가 사람간의 관계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성장은 아주 초보적인 관계 이상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일 터입니다. 그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내게는 그 시절의 맑고 순수하던 그들이 떠오르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욕망 또는 자기 본위적인 욕심이 배제되어 질 수 있었던 그 시절의 순수함, 그 순수하던 사람들이 말이지요. 그러나, 한 편 그것은 그 나이 그 시절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사람의 품성에 의해 달라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즉 진실함을 속속깊이 가진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주일인 오늘, 바쁘게 아침을 정리하고 교회로 향했습니다. 나는 그 곳에서 다시 순수한 열정 그리고 맑음을 누군가에게서 다시 발견합니다. 그리고 내게 익숙하지 않은 색조 안에서의 그러나, 나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열려진 자세를 봅니다.
세월은 우리의 외모를 늙어가게 할 지언정, 어떤 사람들 안의 세계의 순수함과 맑음을 혼탁하게 하지는 못하며, 오히려 흐르는 세월 안에서 그들의 세계는 더욱 아름답고 성숙하게 성장되어가기도 하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은, 그것을 잠시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요. 그것은 하늘을 뒤덮은 구름 가운데에서 뚫고 내려오는 한 줄기 햇살만큼이나 아름다운 희망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음받은 존재인 사람에게서 그 안에 깃들인 순수함과 또 서로 다름 가운데에서 발견될 아름다움 안에서 나 또한 더욱 열려지는 마음과 눈을 가지게 되길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