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운동 세라피 그 두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세라피스트가 지난 시간에 측정한 나의 체력상태가 분석되어져 표로, 숫자로 나온 목록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이와 키와 몸무게 모든 것을 고려한 적절한 이상치와 비교되어져 있었습니다. 유연성은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힘, 즉 체력의 측정치들은 모두가 마이너스 퍼센티지로 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이너스 이십에서부터 보통 마이너스 육십, 가장 낮은 치수는 마이너스 팔십을 넘고 있었습니다. 늘 힘들어 했던 아내의 체력을 남편은 말로만이 아니라 기록으로 본 셈이지요.
사실, 기후와 풍토가 다른 땅에서 더군다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산다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니라 원래 강건한 체력을 타고난 사람이라도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하지요. 그리고, 그것은 남편도 마찬가지이지요.
육체적인 지침은 타고난 체력의 한계도 있고, 이 곳에서의 적응도 문제겠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마음과 생각의 문제는 아니었는 지도 생각해봅니다.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음에도 시달리는 강도는 한국에서보다 더했을 테니까요. 더군다나 한국인의 수가 적다보니, 어느 곳엘 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편해지기는 커녕 점점 더 서로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유감이지요. 그러나 상황이 어땠건간에 나 스스로가 먼저 스스로를 자유롭게 놓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며칠 전, 남편은 나의 강한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남편 조차도 큰소리 낼 수 없는 사람, 즉 목자를 상대로, 그것도 몇 사람이 더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할 말을 다 한 셈이니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없으니, 나 자신을 나라도 지켜야겠다고 말이지요.
말을 할 때는 해야 할 것을, 옆에서 늘 침묵만으로 참고 견디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라 해도,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리고, 남편의 태도와 생각에 따라, 모든 것을 맡기고 행하려던, 나의 생각까지 그 안에 다 속박시키려던 여자들이 갖기 쉬운 본능이 내 안에 지나치게 많았던 것은 아닌 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 대하여도 나 스스로 이제는 달라진 태도를 가지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나를 여러 가지 속박을 채워 내 모는 여러 가지 선입견과 그래야 마땅함을 이야기하는 헛된 종교의 교리나 덕목으로부터도 나 자신에게 자유를 줄 것입니다. 그래서 남에 의해 규정되어진 갇힌 시야 안에 나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터득해 나갈 것입니다. 더욱 자유로울 것입니다. 그리고, 헛된 일들, 나를 갉아먹으려는 헛된 일들은 모두 다 잊을 것입니다. 용서가 필요하다면 어떤 일도 다 용서해야 할 것입니다. 자유롭기 위해서라도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