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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자존심


BY 모퉁이 2010-02-02

결혼하고 여섯 번의 이사를 했다.

처음엔 주인댁 옆방에 세 들어 살았다.

신혼에는 대개가 그렇게 사는줄 알았다.

연탄아궁이에 곤로를 잠깐 쓴 적이 있다.

가스렌지가 연탄가스에 삭아서 녹이 슬기도 했다.

연탄아궁이가 밖으로 나가 있는 집을 찾아 이사를 했다.

그땐 이미 가스렌지가 부식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세 곳을 다니다 연립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어

모든 공간이 한 곳에 집결된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처음 마련한 집을 팔고 두번 째 집을 마련은 했지만

지금 사는 곳과 먼 곳이라 그곳은 조만간 퇴직 후에나 살게 되던지

사정에 따라 살아보지도 못하고 남의 집이 될 지도 모른다.

지금은 다행히도 작으나마 큰걱정없이 살 수 있는 조건의 집에 살고 있다.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일때 들어온 집이 어느새 십 년을 맞고 보니

알게 모르게 늘어난 살림이며 옷가지들로 아이들 방이 좁아보인다.

다 큰 아이들이 아직도 이층침대를 사용하고 있고

불어난 몸집만큼 옷 크기도 커졌고

지나온 세월만큼 책이며 잡동사니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할 때면

이사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든다.

결혼하기 전에 넓고 안락한 집에서 살게 해줘야 될텐데

이러다가 이 좁은 집에서 복작대며 살다 보내야 되나 싶어 한숨이 나기도 한다.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하루에 몇 시간이나 될까 싶기도 하지만

어쩌다 손님이라도 오는 날이면 아이들이 불편해 하고

나 역시 온갖 잡음을 함께 들어야 되는 공간이 답답하기도 하다.

남편이 퇴직을 하면 고향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어한다.

서울에 터를 잡고 살려는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이사..

생각이 많아진다.

퇴직할 때까지 이곳에 눌러 사느냐.

아님 그때까지 잠시 전세라도 나가 사느냐.

3~4년 남겨놓은 이 싯점에 어떤 결정을 내려야 될 지 망설이다

동네 부동산사무실 유리에 붙은 물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급한 상황은 아니어서  설렁설렁 지나가는 길에

물어보기도 하고 알아보곤 하는데

가격이나 위치나 집 상태가 딱 맞아떨어지는 집이 없다.

물건이 나오면 연락주겠다해서 몇몇 부동산에 연락처를 남겨놓고 오기도 했는데

며칠전부터 연락이 계속 오는 곳이 있었다.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미루다가 어제는 몇 집을 둘러보기로 하고 나섰는데

아....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나이에 전셋집을 구하러 다닌다는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고

부동산 사장님도 은연중에 하대를 하는 것 같았고

신축연립주택은 맘에 들긴 했는데 위치가 너무 멀어

남편이나 아이들 출퇴근이 어려울 것 같았고

가족들과 다시 상의해 보겠노라며 되돌아오는 길이 참 먹먹하고 추웠다.

내 가족 몸 누일 공간을 찾는 일인데 그깟 자존심이 대수냐며 위로도 해보았지만

돈 걱정없이 번듯한 새 집을 사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돈에 맞춰 전셋집을 찾으러 다니는 내가 참 안됐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저녁 찬거리를 챙겨들고 내 집 문을 달깍 열고 들어오니

우리집 특유의 냄새가 코끝에 익숙하고

보일러가 돌아간 듯한 따뜻한 공기가 참 편하다.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들어가

옷도 벗지 않고 방문을 열어보고 화장실도 열어보고 베란다까지 내다보았다.

십 년이 넘은 집이긴 하지만 내 손으로 쓸고 닦아 온 싱크대가 아직 멀쩡하고

엄마가 주신 장독 몇 개를 나란히 둘 수 있는 베란다 공간이 있고

장농 들어가고 화장대 놓고도 우리 부부 누울 수 있는 자리가 있고

비록 이층침대긴 하지만 두 아이 몸 뉘고 스텐드 놓여진 책상을

들고 있는 형편은 아니지 않는가.

괜한 생각으로 저녁시간이 늦어졌다.

"우리 몇 년만 그냥 이대로 살까?
아이들 방에 가구배치를 옮기고 각각 싱글침대로 바꾸고

벽을 이용한 수납장을 달고

이참에 벽지를 바꾸면 새 기분 나지 않을까?"

 

사실 나는 사는데 불편함이 없다.

나이 오십에 30평대 아파트 정도는 갖고 있어야 되고

가사도우미는 못쓸망정, 나름대로 문화생활도 즐기고

일 년에 몇 번은 훌훌 여행도 다녀올 수 있어야 되고

친구들에게 근사하게 밥도 살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된다지만

다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남에게 빌리러 가지 않고,

친구들에게 근사하지는 못하지만 따끈한 칼국수 한 그릇 대접할 수는 있고

적지만 구세군 냄비 달굼에 보탤 정도의 여유는 있지 않는가.

마음만 먹으면 돌아갈 수있는 보금자리 하나 있다는 것에 커다란 위안을 얻는 중에

저녁 뉴스에서는 재건축에 밀려난 세입자들의 사연이 방송되었다.

하..위로만 보면 한없이 작아지던 마음이

조금만 굽어보니 그것도 사치였음이라.

그놈에 빌어먹을 자존심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저녁이었다.

 

줄자를 꺼내들고 이리저리 치수를 재보고

좁은 공간 넓게 쓰는 방법을 찾아보고

오늘부터는 부지런히 싼 가구를 찾아봐야겠고

예쁜 벽지도 눈여겨 봐둬야겠고

십 년째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냉장고며 식탁도

위치변경이라도 시켜서 분위기 반전에 시도해봐야겠다.

내 집이란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