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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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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약속


BY 모퉁이 2009-10-27

그래! 꼭 한번 가마.

매번 대책없이 약속만 해댔었다.

올해 안에는 꼭 한번 가고 싶었다.

시월이 가기 전이면 더 좋겠다는 바람을 품고 있었는데

때마침 날아든 청첩장이 초대장 처럼 반가울 줄이야.

'결혼식장에 갔다가 엄마와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친구네로 가는거야. 거기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돌아오는 거야.'

이렇게 해서 시월의 약속을 걸었다.

 

엄마는 부쩍 늙어보였다.

틀니가 불편한지 입을 자꾸 오물거린다.

입에 침이 말라서 사탕을 드신다고 했다.

계피사탕을 드셨는지 꼬리한 냄새가 묻어 있었다.

박하사탕을 드셨으면 화~한 냄새가 날텐데...

사탕 선택 잘못 하셨네 그랴.

 

흰머리를 검정으로 물들이고 파마도 하셨는지 아직 꼬물기가 세게 남아 있다.

지난 생신 때 사다드린 쉐타가 맘에 드셨는지 잘 입는다며

아무 것도 묻지 않았는데 손으로 탈탈 털어대신다.

뒷짐을 지고 걷는 등이 제법 굽었다.

엄마 등은 늘 곧고 평편할 줄 알았는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자꾸 쏟아지고 있다.

 

엄마를 두고 딸년은 친구를 만나러 갈 채비를 서두른다.

언제 올 거냐고 이른 아침부터 재촉하는 전화를 곁에서 들은 남편이

안 가고는 안 될 분위기임을 짐작하고는 따라서 일어서준다.

엄마는 모르신다. 집으로 돌아가는 줄 알고 있다.

영악한 딸년이다.

나의 이런 흑심을 전해들은 남편이 하루 휴가를 내

주말을 끼고 월요일 하루 더 나를 위해 나서주겠다고 했다.

 

문자로 친절히 찍어보낸 주소대로 친구네 별장(?)을 찾았다.

빈집을 빌려 가끔씩 찾아오는 친구들도 묵어가고

수확물을 보관하기도 하고 다용도로 쓰고 있었다.

맨땅에 빨간장화 챙 넓은 모자와 목에 두른 수건의 행색이

아주 농군의 모습 그대로다.

도착하자마자 밀짚모자와 호미를 쥐어주며 고구마부터 캐잔다.

멀뚱한 남편은 이곳저곳 밭고랑을 어슬렁 거리며

말 그대로 쭈삣하고  어색한 자세다.

아내의 친구 댁에 방문한 남자.

마누라는 호미 쥐고 고구마를 캐고 남자는 고구마 줄을 걷고

캐놓은 고구마를 옮기는 일을 한다.

감나무에 감이 휘어지게 열렸다.

일손이 없어 못 땄다며 이번에는 가위를 주며

눈 높이 것을 따라고 하며 저는 잠자리채 같은 것을 들고 후두둑 감을 훑어 딴다.

영문도 모른채 어디 끌려 온 사람 같은 남편은

사다리를 들고 와 감을 따고 옮기기는 하지만

하필이면 왼쪽 어깨 통증이 있는 중인지라

겉모습은 영락없는 머슴인데

하는 짓은 아주 얌체같은 상전이다.

시골의 가을 해는 야속하게도 짧다.

 

어색하던 남편도

반나절 같이 일을 하고 저녁을 먹고 술을 한 잔 하더니

이제는 아주 잠까지 같이 잔다.

사실 남편은 내가 하루 묵고 가는 것을 말렸다.

한참 바쁜데 도움도 못 되고 폐만 끼친다며 얼굴만 보고 가자는 것을

친구가 보내줄 생각도 없고, 나도 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서는

아예 포기를 했는지 보채지는 않았다.

 

시골의 밤은 일찍 찾아왔다.

서울에서는 별 볼 일도 별로 없었지만

시골 하늘에는 별도 총총 밝았고

저녁 일곱시 인데도 적막강산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였다.

50대도 별로 없고 60대가 젊은이며

70대 이상 노인이 대부분인 동네에

50대 젊은 부부가 귀농을 꿈꾸며 터 잡을 준비를 하고 있으니

무척 대견한 모양이다.

농사법도 가르쳐 주시고, 잔 손 가는 일도 도와주셔서

농사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했다.

 

직접 찌고 말린 감잎차를 우려내고

가지에서 익은 홍시를 내놓고

허브향이 은은한 초에 불을 켜놓고

군불로 데운 방구들은 진남철 처럼 내 궁딩이를 떼놓지 못했다.

목이 몇 갈래로 갈라질 때까지 이어지던 회포는

잔잔히 남은 군불 냄새 속에 몇 줄기 남겨 둔 채 희미하게 마무리 했다.

 

이슬이 거둬지면 배추를 솎아야 된다며

아침 나절은 뒤뜰에서 씀바귀를 캐잔다.

봄 내 먹었던 머위도 아직 연잎이 남았다며 똑똑 끊는다.

한 달 전부터 준비했다며 냉동실이며 냉장고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봄 햇살에 뿌리고 여름 땡볕에 익히고 가을 햇볕에 말린 알곡들을

봉지봉지 담고 싸고 매는 모습이 친구가 아니라 엄마 같다.

가는 길에 마시라며 챙겨준 물도 약초물이란다.

 

재미로 하는 농사가 아니었다.

500여평 되는 밭에 작물은 수십가지.

큰 일은 남편이 해주지만 밭농사는 잔 손 가는 일이 많은데

그 일 모두 친구 몫이니 일이 수월할 리가 있나.

그 터에 황토집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항아리로 굴뚝을 올릴테니 그 굴뚝에서 연기 나는 날

또 오라는 말이 자꾸 뇌인다.

 

고구마, 감. 콩. 참깨. 호박, 짱아찌. 배추,시금치, 다래효소,오디쨈,

쟁여넣고 세어보니 스물여섯가지나 된다.

고마움을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선영아~사랑해~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을 가슴 벅찬 이름만 되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