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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리


BY 모퉁이 2009-08-08

주말 아침, 출근할 사람도 없고 먼 길 떠날 일도 없는데

뭔가 굽굽하고 더운 느낌에 눈을 뜨니 막 알람이 운다.

일어날 시간이 되었기도 했지만 온 몸에 휘감기는 습기와

확 달아오르는 가슴의 열기 때문에 더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밤새 얼마나 뒤척였는지 발 아래 괴였던 베개가 저만치

도망을 가 있었고, 이불도 거꾸로 덮고 있었다.

더웠다 식었다 하는 감정의 굴곡과 함께 신체적 변덕도 덩달아 춤을 춘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신문을 대충 훑어 읽고

거실을 왔다갔다 몇 발자국 움직이니 등줄기가 후줄근해진다.

습기를 꽉 머금은 바깥 바람이 후텁지근하다.

비가 올 것인가 말 것인가.

날씨 때문에 차질이 생길 스케쥴도 없으면서 괜히 날씨한테 시비를 건다.

엊저녁에 끓여 놓은 호박죽 냄비를 냉장고에 넣지 않은 것이 눈에 띈다.

큼큼..냄새를 맡아보니 호박냄샌지 쉰낸지 야릇해서

양치도 하지 않은 입으로 한숟갈 퍼먹어보니 쉬지는 않았다.

흠흠..내가 끓였지만 호박죽 하나는 잘 끓인단 말이지.

내친김에 호박죽을 한 공기 퍼다가 혼자 꾸역꾸역 먹어댄다.

이러고도 여덟시도 안 됐다.

뭐야..아직 안 일어날텐가?

'편지왔어요~'

낭낭한 목소리가 울린다.

동네 아우가 이른 산책을 가자는 메시지다.

아침을 챙겨놓고 가야되나 갔다와서 먹여야 되나.

그러고 있는데 비가 한움큼 쏟아진다.

우쉬~비 와서 몬가겄네.

때마침 과일 아저씨 소리가 들린다.

올 들어 처음으로 포도를 한 상자 샀다.

두 송이를 씻어 또 먹는다.

아직도 안 일어난다.

아홉시가 가까워진다.

비가 그쳤다. 또 온다. 뭐야? 놀리나?

왔다갔다 후루룩 쩝쩝..

설마 그 소리에 일어난 건 아닐테고

일어날 시간이 되었겠지.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다 일어난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일어난 사람들 같다.

호박죽 먹어봐라. 포도 먹어라.

방금 일어난 사람한테 먹이부터 들이댄다.

나중에..좀 있다..

생각들이 없는 모양이다. 알아서들 챙겨 먹을라나.

비는 그쳤고, 저들이 아침을 먹을때까지 기다려주기는 내가 지겹고

얼린 물을 한 병 들고 접이 우산을 챙겨들고

친구 할 이웃과 뒷산에 오른다.

점심시간 전에 내려갈 줄 알았던 길이 자꾸 길어지면서

아예 점심을 먹고 돌아갈 궁리까지 하고 나왔는지

자꾸 시간을 보는 내게 은근히 핀잔을 준다.

쉰이 넘은 여자가 스물 넘은 딸년들 밥 걱정 하는 내가  한심했을까.

몸은 산 길에 놓고 마음은 자꾸 싱크대 앞에 서 있다.

결국 이웃댁이 나를 이기지 못했다.

점심을 챙겨 주는데 갑자기 또 열이 치솟는다.

내가 뭐하는 사람인고 묻는다.

누가 나를 가두는 사람도 없는데 나 스스로 갇혀지내는 건 아닌지.

누가 일찍 와서 밥 챙겨 달랬냐고.

알아서 먹고 알아서 굶을텐데, 미리 챙겨주면서 나를 볶는다.

아~몹쓸 병이다.

비빔국수를 말아 꾹꾹 입에 쑤셔 넣는다.

모두들 태연하다.

아무렇지 않다.

내가 점심을 먹고 온다했어도 이렇게 평온할까.

아닐지도 모른다.

아내의, 엄마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모르는 지레짐작으로 내 속을 끓인다.

그런데 참 우습지.

내가 밖에서 점심을 먹었다면 과연 그 시간이 즐거웠을까.

집에 남은 식구들 생각에 맛이나 음미했을까.

이 무슨 마른하늘에 번개 튀는 소리란 말인가.

맛있게 먹지 않으면..즐겁지 않으면..으짤건데..

정말 몹쓸 병이다.

내려놓자, 내려놓자.

아이들도 남편도 너무 감싸며 들고 있지 말자.

내 본분은 지키되, 조금은 자유로워지자.

"나 지금 여기 어딘데 좀 늦을 것 같응게 저녁은 알아서들 챙겨 드셩~"

가끔은 이런 대사도 날릴 줄 알아야 안되겠어? 히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