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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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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끄트머리


BY 모퉁이 2008-12-02

여름휴가를 내지 않았던 남자가 이제사 며칠 시간을 얻었다.

휴가계획도 없었지만 장거리 여행이 여의치 않아 휴가가 여가가 되었다.

주말이 낀 휴가라 주말에 김장을 끝내고

제법 날렵한 남자와 각목같은 여자가 같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등산이어서

어제는 억새밭으로 이름이 알려진 명성산을 향했다.

평일인데다 날씨까지 우중충한 탓인지 등산객은 우리 앞에서 출발한 부부와

산 중턱에서 만난 단체 등산객, 하산 길에 만난 중년 남자 셋이 전부다.

한 때는 뭇사랑을 받았을 억새는 제멋대로 드러누워 앙상한 치부를 드러내고 있었고

바람따라 돌던 바람개비만이 쓸쓸한 벌판에서 혼자 돌고 있었다.

명성산 중턱의 잔설은 계절이 한참 깊은 줄 착각하기 좋았다.

출발지점과 달리 기상이 고르지 못하고 진눈깨비가 사그락사그락 하산을 서둘러야 했다.

따끈한 국물을 마실겸 점심대용으로 준비해 간 컵라면에 부운 물이 금방 식으면서

라면은 제대로 익지도 못하고 불기만 했다.

한무리 단체 등산객들은 등산동우회에서 왔는지 무슨 카페를 위하여~를 외치며

왁자한 웃음을 던졌고, 단체 사진을 찍고는 이내 하산을 했다.

여름에는 녹음이 있고 가을에는 단풍이라도 있지

겨울산은 황량함 그 자체인지라 뭐 볼 게 있냐고 하지만

나름대로  마음을 다잡는데는 겨울산이 최고라며

철학자같은 중얼거림을 흘리는 남자는 이 싸늘한 겨울산에서 무슨 다짐을 했을까.

 

십여년 전에 이름도 생소한 IMF라는 한파가 몰아쳤을 때

솔직히 그 여파를 깊게 느끼지 못했다.

큰돈은 아니지만 월급 밀려본 적 없는 직장의 고마움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늦은 휴가를 얻어 등산을 갔다가

어느 중년 아주머니의 친절함에서 깜짝 놀랬다.

명퇴니 황퇴니 하는 신조어가 생길 무렵이었고

한참 일 할 나이 서른 중후반에서 마흔 초반의 남자들이 대거 백수대열에 서게 되었던지라

낮에 나다니는 남자들은 거의가 명퇴자거나 황퇴자로 낙인 찍혔던 것 같다.

그런 시절에 딱 그 나이의 남편이 그 아주머니의 눈에는 영락없는 황퇴자로 보였나 보다.

가지고 간 김밥이 눈물로 싼 김밥으로 보였는지

측은한 눈으로 '쯔쯔..젊은 사람이 일이 없어서..'하시며 따뜻한 물을 건내던 아주머니.

좋은 마음으로 나눠준 따뜻한 물이 왜그리 아릿하던지..

그 시절의 젊은 황.명퇴자의 대표주자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고는

그늘진 남자들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지를 생각케 했다.

 

휴가 이틀째.

남자가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혼자 북한산을 다녀오겠단다.

휴일에는 사람들이 북적여서 오르기 힘들었던 백운대 정상에 서보겠단다.

정상이 가깝다며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전화로 연락이 왔다.

오십 중반에 접어든 나이.

일 할 수 있는 열정은 있으나 쉬라는 독촉이 가까워진 나이.

정년하면 뭐 할 거냐고 묻는 내게

여태 일했으니 쉴 거라고는 하지만

쉬는 일이건 노는 일이건 그것에 적응하기까지 또 쉽지 않을 성격의 남자가

휴가랍시고 얻은 시간을 산에서 보내며 얻은 다짐은 과연 어떤 미래일까.

 백운대 정상에 서서 자신에게 걸었을 주문은 무엇이었을까.

 

지금쯤 하산 시간이겠다.

오를 땐 땀도 나고 힘도 들었을테지만

내려올 땐 땀도 식고 다리 힘도 풀리고 심심하겠다.

따라 나설 걸 그랬나?

오면 된장찌개 보골보골 끓여 김장김치와 함께 뜨신 밥이나 해서 주자.

혼자 주절거리는 사이 이틀 간의 휴가가 끄트머리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