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먹으니 한나절 안에 닿는 거리인데 마음 먹기까지는 며칠이 걸리는 거리가 된 친정길.
아버지 기일도 아니고 엄마 생신도 아닌데 웬일인가 싶어
누웠다 일어났는지 한쪽 머리가 납작하게 눌린 채로 반가움 반, 놀라움 반으로
어리둥절한 엄마가 펑퍼짐한 바지를 추켜세우며 합죽한 입으로 웃는다.
넉 달 전보다 엄마 입이 더 합죽해진 것 같다.
틀니는 어쩌고 몇 개 남은 앞니가 웃음 끝에 매달려 삐져 나온다.
마침 장날이다.
예전에 그 장 구경을 참 좋아했었다.
더 오래전에는 우시장이 설 정도로 큰 장이었다는데 요즘은 많이 줄었다.
좁은 길에 어깨 부딪쳐가며 흥정하고 덤을 얻고 오래된 친구와
약속도 없이 만나지던 장인데, 이제 누가 나를 치고 가더라도
통성명을 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세월을 비켜가고 있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띌까봐 장구경보다 사람구경에 여념이 없는데
역시나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그런 중에 엄마는 연신 인사를 받고 인사를 하신다.
어묵 굽는 냄새가 고소해서 들여다 보니 '묵고 싶나?'하시고
강정 만드는 가게에서 맛보기로 먹은 씨앗강정을 기어이 사주마시는데
이도 없는 엄마가 드실 수 있는 간식이 아니어 뿌리치느라 땀났다.
호박죽이 풀떡거리며 끓고 있는 죽 집에 빈 자리가 없다.
잔치국수 멸치국물 냄새가 시원하다.
엄마가 따뜻한 국물국수가 당기는지 입맛을 다신다.
모녀는 앉아서 잔치국수 국물을 후루룩 마신다.
정구지 나물을 내 그릇에 옮기고 가늘고 긴 국수가락을 합죽한 입으로 냠냠 드신다.
맛있게 먹었다며 흡족해 하신다.
로숀과 영양크림을 하나씩 사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무척 반가워 하는 몸짓이다.
누구라고 부르는데 환갑은 됨직한 어른이다.
아...내 기억이 꿈틀꿈틀 하더니 이름이 생각났다.
출이 아제다.
어릴적에 아제라 부르던 이웃 아저씨다.
심성 곱고 착하다 소문났던 아저씨가 어느날부터 딴사람이 되어 속된 말로 망나니가 되었다.
술에 취해 노상방뇨하다 언덕에서 미끄러져 팔이 부러지고
지나가는 사람 집적여 시비붙어 싸우고
혹시 나를 아는체 할까 피해 다니기도 했던 아저씨다.
나보다 열 살은 더 많을텐데 결혼은 내가 더 먼저 했다.
훗날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로는 조선족 아가씨와 결혼해서 새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이십여년 만에 우연히 길거리 장에서 만난 아저씨는
깔끔하고 정갈한 모습으로 얼굴색이 환했다.
엄마가 나를 소개 시키자 내 눈을 자꾸 피한다.
"아제~오랫만입니다" 인사 끝에 더 붙인 말도 없이
"내 옛날에 술 마이 묵고 그랬제."
나를 알아봤고 퍼뜩 그 생각이 먼저 난 모양이다.
오래된 일인데 내가 기억하리라 여겼나.
엄마께 과자 한 봉지를 건네고는 멋적은 웃음을 남기고 가던 길을 가는 출이 아제.
아까부터 사주까던 과자였던지라 덥썩 받아 내 손에 안긴다.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어 애타는 엄마 마음을 알면서도
그런 엄마가 안타까워 오히려 싫은 나는 매번 엄마한테 짜증을 내고 돌아온다.
혼자 두고 오는 마음이 짠해서 싫고,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 또한 싫어 슬프고
이래저래 친정길은 즐거움만 있는 길이 아니다.
하룻밤 묵고 돌아오는 차창 밖으로 내던져진 볏짚더미가 동글동글 재밌다가도
동그랗게 말린 엄마 등처럼 느껴져 울컥 목울대가 뜻뜻해졌다.
골목 끝까지 나와 내 그림자를 지켜보던 합죽이 할매가 되어버린 엄마.
이른 잠에 들어 이른 잠을 깨는 엄마의 뒤척임이 며칠 째 찾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