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걸음 15분 정도를 내주면 동네 작은 재래시장에 갈 수 있다.
시장은 지붕도 없고 주차장은 더더욱 없는 정리된 시장이 아닌
시장이란 이름이 어색할 정도로 작은 곳이지만
떡방앗간도 있고, 화장품가게도 있고,채소가게도 있고, 생선가게도 있고,
정육점도 있고, 약국도 있고, 한의원도 치과도 피부관리소도 있는
어떤 가수의 노랫말에서처럼 있어야 할 것은 다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재래시장 활성화 방안으로 시장보기 좋은 여건을 만들고
다양한 이벤트로 손님을 유치한다고는 하지만
이곳은,어쩌다 간판 바꾸어 다는 정육점이나 화장품 가게에서나
풍선달고 음악 띄우고 춤추는 막대인형이 보일 정도이지 변화의 바람은
쉽게 불지 않을 모양새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시장을 즐겨 찾는다.
크게 얻어오는 덤은 없지만 채소류만큼은 저울에 달아 눈금 하나까지
값매김하는 마트보다 싱싱하고 가격도 야박하지 않아 좋다.
어쩌다 발걸음이 잦다보니 몇몇집은 단골이 되었다.
가장 자주 찾는 가게는 채소가게이다.
내 키의 어깨쯤이나 올 듯한 작은 키에 거무스름한 얼굴 빛은
화장기라고는 하나없고 항상 헐렁한 남방셔츠 차림의 주인님의 또랑한 목소리와
한결같은 인사에 마음이 끌렸다.
뭉특한 손톱 밑은 흙물이 들어 투박해 보여도 스치는 손길이 참 따뜻하다.
그 바쁜 틈에도 국내산과 수입산 식품 구분하는 법까지 가르쳐주긴 하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모자란 기억 탓에 묻고 묻고 또 물어도 싫은 대답이 없다.
어느날 아줌마 가게 옆 미장원이 이사를 가더니 그곳에 형광등 빛이 밝은
넓은 채소가게가 생겼다. 선심쓰듯 파격적인 가격에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모처럼 앉아 쉬는 아줌마를 보았다.
속물같은 이 여자도 싸다는 소문에 새 가게에 들러봤지만
글쎄요..
발걸음은 아줌마네 가게 앞에 멈춰졌다.
싸다는 가게로 몰리던 손님들이 다시 제 자리로 찾아들어 아줌마네 가게는
예전의 활기를 되찾은 듯 하다.
다른 한 곳은 떡방앗간이다.
떡을 자주 해 먹어서가 아니라, 떡국을 좋아하다보니 종종 떡국떡을 사면서 부터
시작된 인연이다.
어느 해 겨울, 떡을 사고 거스름돈을 건네는 사장님이
"손 시린데 장갑부터 끼세유~" 하시는 거다.
느린 충청도 말씨가 정겹기도 했지만 그 인사가 무척 따뜻하게 전해졌다.
엄마가 보내주신 쑥으로 쑥개떡을 만들 때도 안주인님은 적당하게 반죽까지 해주시고
바깥주인님은 무겁다며 집까지 운반을 해주셨다.
지나가는 길에 눈인사라도 할라치면 쉬었다 가라며 말인사를 먼저 건네신다.
어떤 이는 그 집 떡이 맛이 없네 어쩌네 하였지만
친절한 주인의 손끝에서 나온 떡이야 말로 어떤 고명의 떡보다 더 맛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추석에는 송편을 설날에는 가래떡을 주문한다.
또 다른 한 곳은 화장품 가게이다.
이 집도 내가 많이 보태주는 곳은 아니다.
비싼 화장품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자주 사는 것도 아닌데
이 집 역시 매장언니의 친절한 웃음이 나를 걸음하게 한다.
어쩌다 한번씩 들르는 가게지만 항상 손님과 접대 중이다.
어떤 날은 시장길에서 샀다는 과일을 놓고 가는 사람도 있고
집에서 쪄왔다며 밤도 몇 알 내려주고 가는 손님을 보았다.
마지막 단골집은 건어물 집이다.
마른 김이나 사고 국물멸치나 사는 정도이지만
여태 안주인의 찡그린 인상을 보지 못했다.
시장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편이어서 비닐봉지를 마다하면
그나마도 고마워서 인사를 하는 사람이다.
얼마전, 주변 사정에 의해서 가게 위치를 옮겼는데
나는 오히려 더 좋아져서 장 보기가 편해졌다.
정육점은 아직 단골이 없다.
고기집이야말로 단골집이 있어야 된다며 돼지고기와 쇠고기 단골집이
따로 있다는 사람도 있던데, 육고기를 썩 좋아하지 않은 탓에
아직 정육점 단골은 정하지 못했다.
참,,미용실도 단골집이 있네.
동네 미용실 언니는 서른이 넘은 노처녀인데
세상천지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책을 많이 읽었는지 들은 이야기가 많은 것인지
사회 경제 연예 인생상담까지 다방면으로 박식한데
어째 제 짝을 못 만나 올 겨울도 옆구리가 시릴 판이라 엄살을 떤다.
같은 솜씨래도 어떤 날은 맘에 들고 어떤 날은 맘에 덜 들어도
머리 맡기기가 편하고 우선 집에서 가까워 시간이 남아서 좋다.
내일이 딸녀니 생일이라 국거리라도 준비해야겠기에
넉넉한 시간을 이용해 오전장을 보러 나섰다.
채소가게 앞이 북적거렸다.
옆집 가게에 비해 턱없이 좁은 가게인지라 손님들은 언제나 길가에서 흥정을 한다.
알타리도 참하고 배추도 맛있게 생겼다는 어느 할머니의 중얼거림을 엿들은 이 팔랑귀.
김장 이후 열무김치 외에 햇김치 한번 못해줬지.
마음 동했을 때 김치 한 번 담궈 봐?
배추,알타리,실파,양파,당근,시금치,브로코리,숙주.
이걸 어떻게 들고 가냐고?
재래시장의 맹점이 주차시설이 없는 관계로 운반이 어렵다는 것인데
얼마치 이상 사야 배달가능하다는 다른 집과 달리
금액에 상관없이 무거우면 대부분 배달이 되는 가게라 걱정이 없다.
그렇다고 무 한 개를 무겁다고 배달시키는 사람은 없을테다.
몇 번 배달을 다녀가신 주인님이 우리집이 멀다는 것을 알고는 미리 배달해주마 하신다.
집 주소를 적은 메모지 한 장 남겨두고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오는 손에는
쇠고기 미역국 대신 대합미역국을 좋아하는 딸의 식성에 맞춰
대합 두 마리와 떡방앗간에 진열된 계란 한 판이 들렸다.
한걸음 뒤, 채소가게 주인님의 탈탈거리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고
도착했다는 신호음으로 크락숀 두 번 짧게 울리고
이내 타박타박 발자국 소리와 함께 묵직한 비닐봉지에는
시월 스무날 하루를 잡아 먹을 일거리가 내려졌다.
배추, 알타리 다듬어 절여놓고 실파 까놓고 그 사이 잠깐의 여유가
시장사람들의 웃음 속에 편편히 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