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513

버려야 할 것과 버려야 할 때


BY 모퉁이 2008-07-15

처음부터 작심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토요일 비가 쏟아지는 시간에 들어선 시동생을 하룻밤 묵어 보낸 뒤  꺼내놓은 이불을 정리하던 것이 시발점이 된 것이다.

별스리 새로이 장만한 것도 없는데 이불장이 포화상태로 변했다.

혹시라도 다녀갈 친지들을 하루라도 재워 보내려면 필요하지 싶어 챙겨둔 이불이며 베개들이 그 주범이었다.

십수년간 이불이 모자라도록 자고 갈 손님이 오지도 않았거니와 구태여 자고 가려는 사람도 없는데도 혹시나,

 행여나 하는 노파심이 내게도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에 큰언니네 아들들 결혼시킬 때 친정식구들이 하루씩 묵어갔는데 다섯자매에 딸린 식구가 모이니 크고 작은 이불이며 방석까지도 제 구실을 독톡히 하긴 하더라만은..-

좋지도 예쁘지도 않은 이불과 베개가 넉넉한 자리를 만들지 못해 진공포장지를 구입해서 납작하게 눌러 공간을 확보했다.

그렇게 보관을 해놓아도 진공봉지에 구멍이 났는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부풀어 한번씩 공기 빼는 일을 해줘야 한다.

그 일을 하기로 한 것이 그만 일을 만들어 버렸다.

이불이라 해야 오래된 것들이라 두껍고 무거워 인기도 없는데다 베개 또한 깨끗이 씻어 둔 것인데 얼룩이 생겨 있었다.

버릴 것은 버려줘야 정리가 되겠기에 네 식구 베개와 여분 몇 개만 남기도 과감하게 버리기로 했다.

이불뭉치와 베개 몇 개를 빼내니 그나마 이불장에 숨통이 생겼다.

 

주방쪽 베란다에 4단짜리 선반이 있다.

큰대야와 소쿠리, 찜솥이나 자주 쓰지 않는 그릇들이 있고,크고 작은 프라스틱 용기와 김장김치 비워낸 김치통들이

여기저기 친구처럼 섞여 있지만 내다버릴만한 물건은 딱히 없는 듯 했다.

그런데 맨 위칸에 테두리가 벗겨진 대나무 소쿠리가 거슬렸다.

막내동서 이바지 음식 담아온 소쿠리인데 두껑이 있고 고급스러워서 얻어왔던 것이다.

물기없는 주방용품을 담아두기만 했지 많이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테두리가 벗겨져 자칫하면 손에 가시가 박힐 염려가 있었다.

플라스틱 소쿠리보다 고급스럽긴 하지만 버리기로 했다.

나머지는 제자리에 정리만 하면 되겠기에 그쯤에서 마무리 하려는데 선반 맨 아래 누렇게 변한 라면박스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묵직한 것이 내용물이 궁금했다.

하나는 1984년부터 2000년도까지의 가계부와 오래된 사진필름과 편지들이었다.

20년 전의 월급명세서가 나의 생활환경을 대변해 주었고, 1984년도 목욕비가 800원이라고 적혀있고

전화비로 200원 300원이 지출되었음은 아마도 전화국에 가서 시외전화를 걸었던 시절이지 싶다.

가계부는  아직 버릴 때가 아닌 것 같다. 작년까지의 가계부를 한 자리에 모아 깨끗한 박스에 담아 이름표를 달았다.

편지도 그대로 보관하고 사진 필름은 없애기로 했다.

다른 한 박스는 아이들 일기장과 쪽지편지 모음함이었다.

나중에 추억이 될 것 같아 모아둔 것인데 일기장은 두고 쪽지편지는 몇 개를 남기고 정리하는 일을 아이들이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 아이들 방정리에서 책상정리로 이어졌다.

한 때는 열광팬으로서 용돈을 쏟아부어 마련한 인기가수의 브로마이드에서 야광방망이와 우비,각종 콘서트 행사에서

구입한 팬용품,그리고 카세트테잎들이 부지기로 나왔다.

한때나마 열혈팬으로 부르짖던 환호는 어디가고, 모든 것을 체념이라도 한 듯 과감하게 정리를 해버린다.

그러는 사이 나도 오래된 카세트테잎을 정리했다.

시디에 밀려 퇴물 취급 받는 테잎이 안됐다.

언젠가 정리를 하면서 남겨둔 몇 개 마져 처분을 하기로 했다.그 중에 한 개만 남기고...

결혼식 녹음테잎이다.

한참 비디오 녹화가 유행이었는데 7만원이라는 가격에 고개를 숙이고 비디오 대신 테잎 하나 남겨놓았다.

언제 들어볼 날이 있을까만은 그것은 남겨놓고 싶었다.

 

현관입구에 있는 신발장이 항상 불만이었다.

신고 나갈려면 마땅한 신도 없으면서 신발장 또한 항상 넘쳐난다.

아이들한테 그렇고 그런 신발들로 자리만 차지한다고 잔소리를 해보지만 막상 버릴 대상은 없다.

한 해만 신고 버리자 해놓고 기어이 한 해 더 신을 작정을 하던 신발들을 꼬아봤다.

저것들을 그냥 버려 말어?

"엄마~나이 들면 신발과 가방은 좀 괜찮은 걸로 해야 돼요."

딸래미들의 시선으로는 내 신발과 가방이 영 마음에 안드는 투였다.

어쩌다 상품권이 생겨 구입한 신발은 이래저래 해를 묵혀 구식이 되고

큰맘 먹고 마련한 가방 역시 옷과 안 맞네, 신발과 안 맞네 하며 나이만 늘리고

그러다 보니 마음 편하게 마련한 시장표 가방과 신발이 몸에도 편해  흔한 말로 본전을 뽑고도 남을만큼 신고 들고 다녔다.

싼 게 비지떡이란 말을 경험한 신발.

두 해 전에 종로거리에서 산 구두는 발등이 아파서 지랄같았다.

새 신이라 그렇거니 하며 위로를 해봤지만 도통 먹히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내치기가 쉽지 않아 집칸을 잡아주었는데 이번엔 내쳐야겠다.

하지만 싸다고 해서 다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이

남대문 시장에 들렀다가 만 원을 주고 산 로펌화는 만 원의 가치 이상을 발휘했다.

어쩌면 발이 그렇게 편한지 한 해만 신어도 어디냐던 것이 두 해를 신고도  밉지 않은 신인데

값이 값인만큼 앞굼치 인조 가죽이 야들야들하게 벗겨져 입을 벌리길래

강력본드로 임시조치를 해서 신어보려 했는데

지난주 백화점 세일기간에 들렀다 비슷한 형태의 신발을 구입하고는 씹던 껌처럼 내뱉기로 했다.

동대문 구두상가에서 가죽구두라 제법 주고 산 베이지색 단화가 잠시 갈등을 일으켰다.

한 해 더 신을려고 뒷굽을 갈아오니, 버릴 물건에 돈 들이는 내가 안됐다는 듯 쳐다보는 딸이 아니더라도

며칠전 병문안 갈 일이 있어 그 신을 신고 갔는데 그날따라 신발이 왜 그리 초라해 보이던고.

베이지색에 검은 때가 타서 지저분한데다 앞코에 덧댄 에나멜이 벗겨진 것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차라리 몰랐더라면,안 봤더라면, 갑자기 내 신을 자꾸 숨기고 싶어지는 것이다.

돌아와서는 당장 버려야지 해놓고는 비 오는 날 막 신어도 좋을 듯 싶어 '장마가 끝나면 버려야지' 하던 것을

과감하게 구겨버렸다.

작년에 작은조카 결혼식에 갈때 신었던 검정색 샌들도 앞볼이 좁은 탓인지 약간 불편하던데 저것도 버릴까..하다

한 번 신은 것이 아까워 슬그머니 두긴 했는데 이것도 미련이지 싶기는 하다.

이렇게 해서 신발장 정리까지 했다.

신발 세 켤레가 떠나자 거기에도 한결 가벼운 숨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한 때는 내 몸을 덮고 내 걸음을 걷게 하고 내 귀를 울리던 것들이 순식간에 쓰레기라는 이름으로 집 밖으로 내몰렸다.

버려야 할 때와 버려야 할 것들을 제대로 안다는 것이 비단 이런 물건들에만 필요한 것은 아닐테다.

낡은 나의 사고와 어줍잖은 고집과 아집, 그리고 욕심들.

나로 인해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나의 욕심을 버려야겠고

나로 인해 아픈 사람이 있다면 그 아픔으로 상대를 안아야겠지.

버리면 가볍고 버리면 넓어진다는 만고의 진리를 알면서도 항상 늦은 후회를 하는 미련함을 오늘도 다 버리지 못함에서 배운다.

 

신발과 가방은 괜찮은 걸로 해야 된다는 논객인 딸래미가 이번 여행에서 그럴듯한 가방을 선물했다.

크기며 모양이 내 취향에 맞아서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았다.

"이제 가방 정리를 해볼까나?"
신발정리에 가방정리까지 하는 에미를 보면서 딸내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사뭇 궁금하다.

그렇다고 내가 뭐 헌날 좋은 신에 좋은 가방만 고집하겠어?
안 사줘도 할 수 없고 그냥, 하나 사 주면 고맙고 그렇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