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치 저녁 계획을 털어놓던 남자.
일주일 내내 저녁 모임이 잡혔다며 미안탄다.
계획대로 첫날은 아침에도 저녁에도 모임을 상기시켰다.
알았으니 갔다 오라 했다.
저녁을 혼자 먹게 해서 미안타는 말에 괜찮다고 했다.
이런 날이 어디 처음이라서 서운할까.
혼자서도 잘 먹고 잘 논지 꽤 되었다는 것을 모르나 보다.
동네 근처에서 모였다며 적당히 취해서 적당한 시간에 들어왔다.
이튿날은 계획에 차질이 생겨 아마 취소 될 듯하니
연락되는대로 소식 주겠다고 했다.
그럴만한 예상이 있었던지 정상 퇴근을 했다.
전날 과음 탓인지 아홉시 뉴스를 보면서 졸고 있다.
보기 딱하다.
가끔 내가 잠을 참아가며 아이들 기다리고 있으면
자기가 기다리겠으니 들어가 자라던 말을 이번엔 내가 했다.
못 이긴척 들어가더니 이내 코 고는 소리를 낸다.
삼일째 모임 장소는 회사 근처라 했다.
술을 마셔 택시를 타고 왔다고 했다.술은 별로 취하지 않았다.
참석자들이 모두 애처가들이었나 보다.
아내에게 잘하자고 하더란다.
많은 걸 배웠는지 나보고도 건강 챙기고 지금 하는 취미생활
열심히 하면서 나를 가꾸라고 한다.
평소 생각이고 마음이었지만 말로 표현 못했을 뿐이란다.
얼마전에 실린 조간신문 기사를 열심히 읽은 티가 난다.
무난한 밤을 보냈다.
다음날 출근은 차가 없어서 카풀을 이용했다.
연말에 가지려던 모임을 아버님 일로 미루어져
송신년회와 함께 아무개씨의 송별식을 겸한다고 했다.
집까지 왔으면서 얼굴도 보이지 않고 모임 장소로
가면서 헐떡거리는 소리로 전화를 했다.
참..급하기는...고기집에 간다더니 옷이나 갈아입고 가지.
다시마 쌈에 적당히 익은 총각김치에 자작하게 지진 우거지를 놓고
저녁을 배불리 먹었다.
종일 침침하던 날씨가 저녁되니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이
싸락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큰 아이 직장과 작은 아이 아르바이트 하는 곳이 가깝다.
퇴근 시간이 비슷해서 둘이 만나 같이 오면 우산 마중을 한번만
가도 될 것 같아 문자 메시지를 넣었다.
그러마고 하는 답에 답은 보내지 않았다.
마른 낙엽위에 떨어지던 싸그락 소리가 툭툭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비가 제법 오나 보다.
창을 열고 밖을 내다 보는 것도 재미없고 혼자 티비를 봤다.
인간극장 세진이 이야기를 보고 황금사과를 보는 중에
언니가 우산이 있어서 우산 마중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작은 아이의 문자를 받았다.
남자한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다.
시간도 그렇고 동네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들어오자 잠깐 집 안에 사람 소리가 들린다.
오자마자 켜는 라디오 소리,씻는소리, 물 내리는 소리, 문자 메시지 오는 소리..
12시가 지나자 아이들도 자고 집 안은 다시 적막감이 돈다.
티비에서는 행님아~하면서 관객을 웃기고 있었다.
오동통한 몸을 떨면서 쫗아~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따라 웃었다.
개그도 끝나고 돌린 바뀐 채널에서는 우리나라 사학법에 관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패널들의 열띤 웅변을 듣다가 보니 이건 마냥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아니다.
술 자리에 있는 남자한테 전화를 잘 하지 않는다.
전화를 해야 할 일도 없거니와 채근한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기에
무사히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편인데 이건 늦어도 많이 늦다.
전화를 들었다.일 분이 넘는 신호음이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다시 걸었다.같은 상황이다.
이제부터 슬슬 걱정과 화가 믹서되기 시작한다.
몇 번의 시도끝에 전화 속에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조금 있다 갈께..]
아니 그럼 아직 못 오고 있다는 거여?
뭐라고 말 할 기분이 아니어서 다음 말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가 올 줄 알았다.어디에 있으니 걱정말고 먼저 자라던가
뭐라 변명같은 말이라도 한마디 할 줄 알았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이젠 새벽 두시다.
다시 건 전화.아까와 같은 현상이 이어진다.
걱정과 화가 부풀어서 터질 것 같다.
몇 번 만에 걸린 전화. 아파트 정문앞이란다.
뚜벅뚜벅 걸음수만 세어도 어디쯤일지 가늠이 간다.
계단 발자국 소리가 울린다.
하나 두울 세엣~
문 여는 소리가 난다.
[앗~미안~]
거수경례를 부치며 딴에는 익살을 떤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여?]
이런 말을 할려고 작정을 한 것도 아닌데 툭 튀어나온 말이 이렇다.
치카거리며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물을 내리고 들어온다.
[내가 당신 마누라기는 한거야?
밥이나 해주고 빨래나 해주고 당신 필요할 때 옆에 있어만 주면 되는 그런 사람이야?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라도 해줘야 되는거 아니야?
이건 나를 무시하는 것이고 나는 당신한테 아무것도 아닌게야.
어제 뭐라했어? 마누라 한테 잘 하자고 하더라고? 이게 잘 하는게야?
킁~(코웃음)]
[당신 무슨 그런 소리를 하노]그리고 주절주절..귀를 막았다.
코도 골지 않고 잠은 조용히 잤다.
[내일은 일곱시에 출근해야 된다.]
속으로..
내일은 무슨 내일 오늘이지..가던가 말던가.
6시 반에 알람이 울렸다.
울리던가 말던가.
알람을 끄고 잠시 누웠더니 일어나 부시럭거리며 씻는다.
씻던가 말던가.
끓여놓은 북어국은 싸늘한 채 냄비에 그냥 있고
꺼내놓은 속옷은 바꿔입고 셔츠는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신문을 들여다 놓고 현관문을 잠그고 남자는 그렇게 출근을 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출근 배웅은 한다.
좀 웃기지만 지금도 우리집 출근 인사는 입맞춤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그러고 싶지가 않다.
서로간의 직무유기일 뿐이다.
남편이 나가고 웅크렸던 몸을 펴고 편안히 다시 누었다.
한 시간 여 지났을까.
휴대폰 문자멜로디가 울렸다.
남자다.
간단한 한마디가 들어있다.
[미안타]
칫~그러면 뭐 [괜찮타]하고 답을 보낼줄 알았겄지?
요즘 말로 답장 씹었다.
오늘 또 회식이 있는줄 안다.
오늘은 어떤 희극이 벌어질런지...
마누라 눈치 보며 사는 것을 원치는 않지만
마누라 기분 정도는 헤아릴 줄 알았으면 좋으련만
도통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남자를 어찌하면 좋으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