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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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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내가 사랑이었을까


BY 모퉁이 2005-09-22

 

그 사람은 내 친구와 아는 사람이었다.

나이 차이가 있어서 나는 아저씨라고 불렀다.

가끔 친구와의 데이트 자리에 눈치없이 끼어 차 한 잔

얻어 마신 적은 있었지만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둘을 방해한 적은 없다.

 

어느날 둘 사이에 냉기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자주 만나지도 않는 것 같았고 그 사람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내가 끼어들 거리가 아니어서 방관자로 물러나 있었다.

 

우연히,정말 우연히 혼자 걷다가 여러사람 속에 섞인 그 사람과 마주쳤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그 사람이 불렀다.

잠깐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가던 길도 있었고 혹시 친구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다음날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나는 내 친구와 약속을 잡았고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멀어진 둘 사이를 이어주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내가 받을 편지가 아닌듯 하여 고맙지도 반갑지도 않았다.

편지를 보내지 말라고도 주소 출처도 묻지 못했다.

괜한 인연이 되고 싶지가 않았던 내 뜻과 상관없이

그 사람의 편지는 더 자주 날아 들었다.

일상적인 글을 보낼 뿐이었지만 부담스러웠다.

내 나이 스물하나에 그 사람은 스물여덟인 것도 그렇고

내 감정과 상관없었고 무엇보다 내 친구가 걸렸다.

 

동생처럼 생각했던 내 친구가 연인처럼 여겨 부담스럽더라는 남자가,

내가 아저씨라 불렀던 그 남자가,아닌데 이게 아닌데..

누르스름한 갱지에 가득 채운 글씨로 일상을 알려오기 몇 달이 지났을까.

우연을 가장이라도 한 듯이 길에서 또 마주쳤다.

답장도 없는 편지를 보내던 사람이 말없이 웃기만 하고 서 있었다.

처음으로 둘이 차를 마셨다.

할 말도 없었는데 마침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준 다방의 디제이가 고마웠다.

그리고 나와서 잠깐 걸었는데 어디쯤 왔을까.

잠깐 있으라 해놓고 헐레벌떡 다녀온 그 사람의 손에는

납작한 네모봉투가 들려 있었다.

집에 가서 보라고 하였다.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고 대신 친구를 보냈던 날의 낙서가

한가득 적힌 엘피판이었다.

음악을 좋아하고 글쓰기 좋아한다는 말은 얼핏 들은 것 같았다.

그날 내게 바람(?)맞고 돌아오는 길에 샀는지

날짜가 그렇게 적혀 있었다.

빈 공간에 빼곡히 적힌 낙서는 내 이름이 섞여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그쯤에서 감격을 하겠지만

그런 감정이 묻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런 내 마음에도 개의치 않고 편지는 계속 되었다.

 

어느날,그 사람이 외국으로 나갈 일이 생겼다는 편지를 보냈다.

몇 개월 걸린다고 했다.

그 사람을 알고 처음으로 내가 한 번 만나자고 했다.

별도 없는 까만 밤이었다.

나는  아저씨라 불렀고 그 사람은 나를 소녀라고 불렀다.

편지 끝에는 자신을 '어른'이라고 표현했었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했고,올 때까지 잘 있으라 했다.

까만 하늘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급하게 우산을 마련한 아저씨와 우산 속에 숨었다.

그때 아저씨가 말했다.

[혹시 신인가수가 이런 모습일까.

한 손에는 마이크를 잡았지만 다른 한 손은 어디에 둘까 어쩔줄 모르는...]

한 손은 우산을 들었지만 다른 한 손을 어디에 둘 지 모르는 자신이 그렇다고 했다.

손도 한 번 잡지 않았다.그렇다고 어깨도 한 번 만지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지고 아저씨는 떠났다.

 

편지대신 가는 곳곳의 엽서가 날아들었다.

엽서가 쌓이면서 내게 그리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움이 쌓이자 덜컥 겁이 났다.

더 힘들기 전에 정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난 아저씨를 좋아하긴 어렸고 내 감정이 깊어질까 막연한 두려움이 생겼다.

 

겨울이 깊어가던 날,무심코 흔들리는 바람소린줄 알았다.

아까보다 더 세찬 바람소리에 나는 아저씨 그림자와 마주쳤다.

무척 피곤해 뵈는 모습으로 찾아왔다.

'아저씨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하지만 난 아니에요.

아저씨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도 하시고 난 그냥 아저씨한테

여전한 소녀이고 싶어요.'

무어라 소리치며 아저씨가 던져놓고 간 상자 속에서 튀어나간 구슬은

검은 하늘에 별처럼 요란스럽게 뛰어 다녔다.

 

그 해 겨울이 가고 새 봄이 오고 또 계절이 바뀌었다.

스치듯 지나친 어깨에 놀라 돌아 본 두 사람은 잠시 멈추어 섰다.

스물셋이 된 나는 소녀라기보다 숙녀였고

아저씨는 여전히 아저씨 그 모습이었다.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하자 으례 그 웃음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잠깐 걸었다.

선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했다.

몇 권의 일기장을 태웠노라고 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 알았으면...'말끝을 흐리고는

장난같은 웃음을 고개 뒤로 흘려 보내는 것을 보았다.

내가 먼저 아저씨 손끝을 잡았다.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다.그리고 아무말 없었다.

잡았던 손을 놓고 가던 길을 각자 걸었다.

그렇게 걸어온 길이 어느새 스무고개를 더 걸었다.

 

그 사람과 만난 몇번은 정말이지 약속도 없이 우연이었다.

그 우연이 끝내 긴 인연을 엮지는 못했어도

기억 속에 남겨진 인연이라 하면 억지일까.

 

나는 그 사람을 사랑이라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도 내게 사랑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첫사랑이란 글 앞에서 그 사람이

생각나는 것은 왜 일까.

그 사람은 내가 사랑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