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 고향의 5일장이 서는 날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는 대형마트가 근처에 없어서 주로 재래시장을 보는데
이곳은 고향 시장의 반토막도 안되는 규모인지라
몇바퀴 돌 것도 없이 눈에 띄는대로 몇가지 챙겨 오는 정도랍니다.
비가 온다는 예보는 있었지만 언제 올 지 해가 삐굼히 내밀길래
그래도 준비정신은 있어서 우산 하나 챙겨들고 시장에 가봤더랬어요.
입구에 방앗간이 세 군데 있는데 송편 빚을 준비로 바쁩디다.
소쿠리마다 불린 쌀이 소복하고 허리가 구부정한 할매는
솔잎 다듬느라 바쁘시고,아무리 시절이 변했다 해도
우리네 정서에는 추석 하면 송편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송편소는 깨도 아니고 꿀도 아니고
껍질벗긴 동부콩을 으깨어 넣은 것입니다.
그 옆으로는 채소가게가 있는데 토실토실 알토란이 나와 있습디다.
경상도에서 탕국에 해물이 들어가듯 서울에서는 토란이 꼭 들어간다 하네요.
토란국은 언제 먹어봤던지 그닥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그 앞에는 옷가게가 있는데 추석빔을 장만하는 사람이 없는지
아줌마는 티비만 쳐다보고 있습디다.
옷가게는 재미가 없어 보입니다.
닭다리만 튀겨서 파는 집이 있는데 그 집도 아직 한산하고요.
만두집은 아예 문을 열지 않았고요,
철물점 문 앞에 걸린 마당 빗자루를 보니 명절 앞두고 대청소 하던 날
몽당 빗자루 들고 축담을 쓸던 기억이 나더라구요.
제수용품을 파는 건어물가게는 제법 바빠 보였습니다.
그 집 떡볶기 떡과 어묵이 맛있어서 들를까 하다
앞집에서 아욱 한 단을 사고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비디오 가게는 안이 시커매서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이 안됩디다.
부동산 가게는 컴퓨터 앞에 앉은 통통한 여자가 컴퓨터 마우스만 굴리고 있었고요.
짧은 골목 안에 미장원이 몇 군데 되는데 미장원 쇼파에는 손님이 많았어요.
머리에 파마 수건을 덮어 쓴 할매는 그 사이에 동태포를 뜨러 와 계셨고
참기름집에도 보자기 수건을 덮어쓴 아줌마가 참기름 냄새를 확인하고 있었어요.
예전에 보아왔던 풍경이라 그리 낯설지 않더구만요.
추석이나 설날 며칠 전에 울엄마들의 행사 중에 하나가
불파마를 하는 것이었지요.
추석 임박해서는 다들 바쁘시니 여유 있을 이맘쯤에
머리에 보자기를 쓴 채 시장통을 다니는 하이패션의 선두주자였던 엄니들.
적당히 꼬불해진 머리를 하고 명절 전날 지짐이 부치고 난 뒤
기름냄새도 삭히고 묵은 껍질 벗기러 가는 곳이 목욕탕이었지요.
때국물이 둥둥 떠다니는 목욕탕은 그야말로 대목탕이었어요.
때로는 허옇게 불은 때를 그대로 달고 오기도 했지만
그렇게 해서 공식행사인 목욕행사를 마무리 하고는 명절맞이를 했었는데
요즘은 목욕탕이라기 보다 찜질방이란 이름의 휴식공간으로
매김한 지도 꽤 되었지요?
시절이 변해서 그 시절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이런 향수가 남아 있습니다.
추석 며칠 전에 사다놓은 나일론 셔츠를 몇번이고 꺼내보고
소매끝에서 나던 나프탈렌 냄새까지도 좋아 어쩔줄 모르던
까마득한 유년이 이맘때면 점점이 다가옵니다.
갑자기 쏟아진 비를 어깨 위에 툭툭 맞고서야 지하보도 입구에서
우산을 펼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