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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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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BY 모퉁이 2005-08-31

우리가 재회를 한 것은 3 년 전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학을 가거나 다른 학교를 다닌 친구가

아니면 거의 같이 중,고등학교를 함께 하긴 했지만

대학진학과 사회생활로 갈라지면서 소원해지거나

잠시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그 만남을 3년 전에

몇몇 마당발 친구들의 수소문으로 연결되어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정기 모임을 가졌다.

 

2~30년이 넘는 공백기간에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결혼이라는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면서

그들만의 새로운 환경이 주어지면서 남편들의

지위와 계층에 따라 그들이 가진 색깔도 달라져 있었다.

 

평범한,아주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처음엔 정말 아무런 벽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어릴적 친구,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우린 친구일 뿐이었다.

만나면 반갑고,옛이야기로 즐거웠고,돌아오면 허전함도 있었다.

만남의 횟수가 잦아지면서 차츰,각자의 현재 색깔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들 과외 이야기며,남편의 직장이며,사는 집 평수에,

벽에 걸린 액자값이며 며칠 전에 산 카페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그 사이에 끼어들 틈새를 찾지 못하던 나는 차츰 말 수가 줄어들었다.

고개만 끄덕여 주고 나오는 밥이나 먹고,누군가 통 큰 친구는 그 날 밥값을

내겠다고 먼저 일어서기도 하지만 나는 개인풀이 할 때 덜 내는 일만은

하지 않고 계산대로 해주기만 했다.

 

집들이를한 친구네에서 처음으로 이상한 외국 음식을 먹어보고는

김치와 맨밥을 찾던 나를 우습게 쳐다봤지만,나중에 알고보니

나처럼 속이 메시꺼웠다는 친구가 또 있었다.

다만 표시만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주방과 거실이 멀어서 한참을 슬리퍼 끌며 걸어가던

키작은 그 친구의 복은 어디에 다 붙었는지 내심 부럽기도 했다.

 

집집이 돌아가며 점심을 먹자는 제의에 반대표를 던졌던 나.

'니들 우리집에 와서 서 있다가 갈려면 와라.

커피잔이 모자라 종이컵에 줘야 되는데도 괜찮겠냐?

신발장도 모자라 현관 밖에 내놔야 겠는걸..

니 비싼 구두 잃어버릴지 모르니 헌 신 신고 와라.'

구질구질한 변명을 몇 마디 하고서 엄청 후회도 했다.

내가 이런말 한 것을 알면 우리집 남자 엄청 화를 냈을 것이다.

결국은 몇 집만 구경하고 우리집은 대문 구경도 못했다.

 

아는 동생이 나더러 동창회 가느냐고 물었다.

간다고 했더니 언니는 성공했단다.

왜?

동창회는 성공한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 하더란다.

그런거 아니야..왜..기 죽을까봐?

 

동창회에 나오라는 성화에 생각해 보마고 했는데

나더러 가도 되겠냐고 물었을 때 그땐 말했다.

'니 맘이겠지만 나중에 혹시 상처 받을 걱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가지 마라.처음처럼 끝까지 좋기가 어려운 것이 또 그 동창회더라.'

그 말을 해놓고 또 한 번 나의 이중성과 잘못 내린 정의에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다 그렇진 않을텐데..

 

처음엔 여자들끼리 모였던 모임이 흩어졌던 남녀가 모이게 되자

규모도 점점 커지고 씀씀이도 커졌다.

저녁만 먹고 지난 이야기 하면서 웃고 즐기던 시기는 지난 모양이다.

2차도 가게 되고,여흥이 길어지고,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는 나는

중간에 빠져 나와야 되는 눈총도 받게 되었다.

다음날 뒷담을 들어보면 꼭 한가지 화근이 생겨 있었다.

'누구는 어제 좀 어떻더라.'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꼭 그 친구에게만 들리라는 법이 없다.

구설수는 항상 뜰 수 있으니까..

 

회의가 생겼다.

친구도 좋고 건전한 모임도 좋지만 우선 나와 어울리느냐가 중요했다.

억대 연봉의 남편자랑을 더 이상 들어줄 기운도 없고

수재 아들 잘난 인생에 내 아이 비교 되게 하고 싶지 않고

벗어 놓은 신발 메이커나 알아 맞히는 수준에 내 발을 옥죄고 싶지도 않고

하나 사면 몇 년은 고수하는 립스틱을  색깔 맘에 들지 않는다며

내다 버리는 그런 사고에 물 들기 전에 내 정리를 해야했다.

 

어찌하면 내 궁색한 변명은 감추고 정중하고 교양있게

탈회를 선언할까 며칠을 고민하다 내 친구들에게 고했다.

나는 너희들을 마흔 일곱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다고..

무슨 소리냐 ,왠 소리냐, 몇 일을 와글대더니 잠잠해졌다.

개구리도 한 때 울지 헌날 울지는 않는다.

 

어릴때부터 나는 있는듯 없는듯 한 아이였다.

목소리가 이뿌지도 않지만 크지도 않아서 있는듯 없는듯 했고,

행동도 산만하지 않아서 있는듯 없는듯 했고,

다만 큰키가 보이지 않아 없음을 알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 정도였다.

지금도 어디에서든 미리 나서는 일도 없고,앞장 서는 일도 못한다.

끄는 일보다 미는 일이 나는 더 편하고 좋다.

 

지난 주에 모임이 있었던 모양인데

총무가 바뀌었다더니 이젠 내게 연락조차 주지 않는다.

비록 내가 탈회는 했지만 연락마져 끊는다 하니

서운하기는 하다.이럴때 또 내 양면성이 탄로난다.

그렇다고 뒷소식을 전해주는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안부는 따로 듣고 전하기도 하니까..

 

이번에 또 구설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좋은게 좋다는 말로 나를 감추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니다 싶으면 가차없이 끊는 것도 방법인 것 같다.

처음엔 그 행동이 경솔했나 싶지만

지나고 보면 현명한 판단일 때가 더러 있다.

지금 내가 그렇다.

처음엔 주변 친구들을 황당하게 한 죄는 있지만

지금은 어쩔수 없이 나가게 된다는 친구 말을 빌리지 않아도

인간관계는 얽힐수록 복잡하고 힘든 무게 같으다.

 

아프다 하면 약 먹었냐는 위로 한 마디 해주고

갑자기 급할 때 단돈 얼마라도 꾸어 달라고 손 벌려도

흉이 되지 않는 있는듯 없는듯 먼 발치에서

가끔은 느닷없이 보내는 문자 하나에도 감격하며 급한 김에

 답문대신 전화벨을 울리게 해주는 그런 친구 몇 명만 있어도,

 몰려다니며 밥값보다 더 비싼 차값 지불하는 무리친구가

없다고 해서 그닥 부러움은 없다.

이 모든 것을 다 같은 윤리와 잣대로 재고 싶지는 않다.

내가 그렇다는 것이다.

 

며칠만에 올려다 본 하늘은  하늘색 대신 연회색이다.

낮게 나는 고추잠자리 꽁무니는 빨간색이다.

고개 끝에 달린 북한산 자락에는 파란 바람이 불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