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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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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


BY 모퉁이 2005-07-27

 

올해로 가계부가 23권이 됩니다.

처녀때부터 금전출납부를 갖고 있어서 항상 수입과 지출을

적어 두곤 했었는데 본격적인 가계부는 결혼생활을 시작하던

1983년 부터였습니다.

새해 시작부터 적은 것이 아니어서 그 해는 일반 노트에 기록을 했습니다.

다음해 부터는 연말 여성지를 사면 부록으로 나오는 가계부를 썼는데

일 년에 한 번은 여성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은 아니고 남편의 특별 선물이었습니다.

여원이나 여성중앙을 주로 샀는데 몇 해가 지나자 꾀가 생겼습니다.

여성지에 나오는 내용이 대부분 연예인들 이야기이고

인테리어 내용도 셋방살이 하던 나와는 거리가 먼 꾸밈새였고

무엇보다 연말 여성지는 값이 비쌌습니다.

어쩌다 동네 미장원에라도 놀러 가면 지난 여성지를 읽을 수 있었고

읽고 나면 책꽂이에 꽂힐만한 책이 아니어서 그냥 폐지로 넘어가는 책을

비싸게 주고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그만 두라고 했습니다.

 

월급 봉투를 받다가 어느해 부터 월급이 통장으로 입금되었습니다.

그래서 월급날이 되면 거래 은행에 들러야 했습니다.

적은 월급으로 적금은 꼬박꼬박 넣었습니다.

많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나중에 큰 보탬이 되어 보람을 느낀 적 있습니다.

연말이 되니 은행에서 달력도 주고 가계부를 주더라구요.

여성지를 사지 않아도 되었고 빈 노트를 찾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다 어느해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은행에서도 긴축 작전을 쓰느라

달력도 가계부도 귀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수고객에게만 준다면서 살짝 건네주던 가계부를 고맙게 받아 쓴 적 있습니다.

어느 해는 동생이 다니던 보험회사에서 준 가계부를 썼고

지금은 5년 째 대주다시피 하는 아는 동생의 금융회사 가계부를 쓰고 있습니다.

 

가계부를 적는다고 하면 모두 대단하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저의 가계부는 그저 입출금 내용을 기록하는 수준일 뿐입니다.

계획은 이미 정해진 월급 한도로 매겨져 있는 것이고

어디에 얼마를 지출했는지 어느 시절엔 쌀 값이 얼마였는지 알 수가 있고

냈는지 안냈는지 아리송한 세금 관리 등으로 실갱이 할 일은 없습니다.

요즘은 주로 신용카드를 이용하기 때문에 영수증이 많습니다.

일일이 파 값이며 두부값을 적지 않아도 영수증에 적힌 품목과 가격이

그 해의 물가를 알려줍니다.

작년 대비 가격을 비교해 보거나 월급액수를 비교하기에도 용이합니다.

 

가계부는 달이 갈수록 배가 볼록해집니다.

각종 영수증과 월급 명세서까지 너덜하게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빈 공간에는 간단한 메모가 들어 있습니다.

가족들 생일이라던가,집안 행사일에 다녀온 기록이 있고

빠지지 않는 것이 내 생리날짜 입니다.

 

요즘처럼 더운 날에는 찾아 오면 귀찮고

오지 않으면 서운할 나이의 그 손님.

그 손님이 오신 날을 꼬박꼬박 기록해 놓습니다.

한 달도 걸르지 않고 찾아 오던 손님이

지난 달에는 닷새 늦게 오는가 싶더니

이번 달에는 날짜도 어기지 않고 중복더위에 왕림하시어

무척 힘들게 했습니다.이제 슬슬 돌아가실 준비를 하는지

하품을 하며 시들해 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제는 가계부에 적을 내용이 별로 없었습니다.

작은 아이 윙크에 반해 내놓은 만 원과

서예교실 회비로 만 원을 내었고,쓰레기 봉지 10L짜리

두 묶음 4000원이라고 젹혔고 오늘은 아직 정리하지 못했지만

별로 적힐 내용이 없을듯 합니다.

그래도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펼쳐들게 되고

가까이 두지 않으면 허전한 친구가 되어 버린 가계부.

볼펜 한 자루와 기계식 계산기가 오늘 날짜에 맞춰

함께 하고 있는 가계부를 나는 앞으로도 계속 쓸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