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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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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쉬는 나무평상


BY 모퉁이 2005-06-21

 

통마늘 장아찌는 익어서 저녁찬으로 꺼내는데

오이지는 아직 담지 못했다.

네 식구 중에 셋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서

혼자 먹으려 담구기도 그렇다.

갑자기 찾아올 이도 없구만 혹시 그런 손님 생길까봐

지레 걱정해가며 오이지를 담기로 마음먹고

오십개 들이 봉지를 하나 주문했다.

8000원인데 배달비 빼준다며 7000원을 달란다.

들 수 있을 것 같던 무게가 몇걸음 걷자 무겁게 늘어졌다.

간난아기 안듯이 오이 봉지를 가슴에 안고

낑낑대며 경사진 마을 입구까지 오자 등줄기가 축축해졌다.

 

지은지 30년이 넘어 재개발 되어야 한다는 아파트가 있는데

주민여력도 없는데다 마땅한 건축주가 나타나지 않았는지

늘상 불안한 상태로 하루하루 견디고 있는 아파트인데

주상복합 아파트 원조격인지 5층 건물 맨 아래 첫 집은

오래된 공중전화가 선 채 걸려 있는 작은 구멍가게였다.

슈퍼란 이름도 걸지 못하고 00식품이란 아크릴 간판이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어느 시골마을 구멍가게를 연상케 하는데

이 집 앞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둥근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그늘 아래에는 노란색 장판지로 덮개를 한 네모난 평상이

언제 봐도 편안하다.

학교 다녀오는 아이들도 앉아서 쉬고,소식가방 짊어진

우체부 아저씨도 인사 나누고,허리 구부정한 할머니는

마늘톨 담은 양재기를 들고 나와 까기도 하고,

유모차 밀다 지친 어느댁 시엄니도 부채질 접고 땀을 식히는 곳이다.

 

그 곳을 지나치면서 부자들은 아니지만

정겹게 살아가는 이웃의 모습들을 훔쳐보곤 했었는데

언제부턴지 그 00식품 간판이 내려지고 드르륵 말려 올라 갈 것 같은

철재문이 자물통을 머금고 있다.

대형마트에 배달 가능한 슈퍼가 생기면서

소매값의 구멍가게가 수난을 당한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건만

그래도 꼬맹이들의 코묻은 돈으로 아이스크림이며,막대 사탕이며

급한대로 라면 한봉지 쉽게 살 수 있는 가게였는데 문 닫힌지 제법되었다.

 

오이지감을 안고 낑낑대고 지나오다 흘깃 그 평상을 훔쳐보았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고 미리 떨어진 나뭇잎만 몇조각 앉아 있었다.

손으로 평상을 쓱 문지르자 꺼칠한 먼지가 손바닥을 털게 한다.

비닐봉지 하나 꺼내 깔고 앉아 커다란 느티나무 꼭대기를 올려다 보았다.

이파리 사이로 하늘이 파랗다.

노란색 장판이 반질하도록 문질러 대던 그 군중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누군가 내 놓은 네모난 스티로폼 박스에 심긴 고추가 한가롭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 조그만 가게가 이웃간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역이었던가 보다.

아무도 오지 않는 간이역에서 놓칠세라 깨질세라 조심스레

오이보따리를 안고 일어서자,집보다 바깥 바람이 더 시원한지 확인하려는 양

낡은 아파트에서 고무바지 추스리며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신다.

[어허~덥네.]하시며 평상위에 먼지를 입김으로 불어내시더니

[갈라요?]하신다.[네..]하자 다시 한 번 허리춤을 고치고는

나왔던 집 쪽으로 종종 걸어가신다.

 

오늘도 간이역에는 다음 손님이 내리지 않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