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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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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 되려다


BY 모퉁이 2005-06-16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장만한 것이 아이들 크는 모습을 담으려는 카메라였고,

 다음으로 장만한 것이 소리도 빵빵하고 우렁찬 오디오라는 것이었다.

볼륨을 최대로 올릴수도 없을만큼 소리가 크고 묵직했다.
턴테이블에 엘피판을 올리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시커먼 판에서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오던 날,얼마나 감개가 무량하던지,

사는게 이런거구나 싶고 우리도 이제 문화인이 된 듯했다.


어릴때 가정환경조사서에 전축이 있는지 티비가 있는지 라디오가 있는지,

 집은 기와집인지 스레트집인지,전세인지 월세인지까지 기록하던 시절에, 

전축에 티비에 동그라미 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을 내 아이에겐 

해줄수 있겠다 싶었지만 그땐 이미 그런 조사는 하지 않더구만.


어쨋거나 전축이 검정색 케이스에 담겨져 안방에 자리잡자 내가 갑자기 

음악 애호가가 된 듯이 가슴이 다 뻐근했다.

기계치인 나도 끼어들어 이런저런 시운전(?)을 했다.

라디오는 물론이고 테이프도 꽂아보고 턴테이블도 돌려보고 

그리고 또 하나는 이름도 생소한 CD라는 것이었다.

커다란 LP대신 CD가 유행이라는데 그때만 해도 값이 제법했다.

당장 한꺼번에 많이 구입은 못하더라도 한 달에 한개씩은 구입해서 우리도

구식 엘피 대신 신식 시디를 듣자고 했다.

 

그런데 사는게 어디 마음대로 그리 호락호락 하던가.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CD는 고사하고 고속도로 테입도 맘대로 사지 못한채 

그 성능좋고 모양 번드르한 오디오는 집안에 장승처럼 되어버렸다.
아이들 유아용 테입이나 틀어주고 라디오나 듣고 어쩌다 한번 마음 뒤숭숭한 날

 오래된 엘피판을 턴테이블에 올려놓으면 낡은 엘피판이 튀어 잘 나가다 

반복되는 가사가 속을 더 뒤숭숭하게 만들곤 했다.

그래도 음악은 엘피판 턴테이블 위에 올려 듣는게 제멋이라고 

풍월을 읊어대는 남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몇 달만인지 시내 쇼핑을 하다가 음악사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예전엔 레코드사라 했는데 그런 간판은 보기가 어렵고,어린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북적대는 음악사 한쪽 구석에서 우리도 음악 애호가인양
이것저것 테입을 고르다가 큰맘먹고 CD를 하나 사기로 했다.

막상 사려니 뭘 사야할지 망설여졌다.

고르고 고르고 또 골라 하나 산 것이 그때 유행하던 [립스틱 짙게 바르고]가 

수록된 주부가요베스트라는 시디를 하나 골랐다.

그 당시 가격으로 일만원이 넘었던거 같은데,요즘도 그 정도 가격이라 한다.
앞으로 한 달에 한개씩은 사자고 약속했다.


집에 오자마자 CD를 꽂았다.
전주가 나온다.립스틱 짙게 바르고는 전주가 좀 길다.
성질 급한 사람은 화장실 다녀와도 될 정도다.
디리리리 디리리리 디리리리리.......반복하고..♬
이쯤에서 ♪ 내일이면 잊으리 꼭 잊으리~~♪하고 임주리의 간드러진

노래가 나와야 되는데 기다리는 노래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이상하다.
아~~벼르고 벼르다 산 CD인데 이게 무슨 벙어리 CD란 말인고..
"00이 아빠~CD 잘못 샀나벼"
"그러게 말이다.이상하네.."
"음은 나오는데 왜 노래가 안나오지? 정말 이상하네"


다음곡 다음곡 들어도 들어봐도 노래는 나오지 않았다.

 아줌마표 용기를 짊어지고 다음날 당장 시디를 산 음악사에 갔다.
"아저씨~저기....이 시디요...어제 샀는데요...노래가 안나와서요...

좀 봐 ....주시면..안 될 까 예?"
"그래요?줘보세요."


아이고..
그 다음에 나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음악사를 나와야 했다.
"아줌마~이건 경음악 CD인데요//"(사장님 속으로 얼마나 웃었을까.)
애초에 경음악 CD를 샀으니 노래가 나올리가 있남?
사용한 물건이어서 반품은 물론이고 교환도 안되고 결국은 되가져와서 

경음악용으로 지금도 가끔 듣는 CD인데, 그날 난 아줌마의 끗발도 위력도

 다 뭉개지고 사춘기 소녀처럼 붉어진 얼굴을 어디다 둘지 몰라 도망치듯

 가게를 나와버렸다.
문화인 한번 되어보려다가 완전 원시인 취급 받았다.


요즘은 작고도 좋은 기계가 많아서 덩치 디립다 큰 그런 오디오는

 천덕꾸러기 신세지만 그때 그 오디오를 나는 지금도 갖고 있다.

아직 쓸만하기도 하고,무엇보다 결혼후 내 손으로 장만한 물건이기에 

애착이 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음먹은대로 다달이 CD를 사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이 크니 저희들

 취향에 맞는 CD를  사 모아서 지금은 제법 된다.

아이들은 저들 마음에 드는 기계를 방에 두고 듣는다.


글 쓰는 등 뒤로 시커먼 오디오가 쳐다보고 있다.

낭패보게 했던 기억의 CD를 꽂아볼까나.

노래는 내가 부르지 뭐..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