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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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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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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BY 모퉁이 2005-05-10

아주버님이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갔을 때

어머님은 인물이 맘에 안드신다고 반대하셨다고 했다.

내가 본 형님 인물이 못난 인물도 아닌데

뭔 핑계가 없으니 그런 핑계를 대지 않았나 싶다.

 

둘째인 남편에게는 짝지어 주고 싶은 여자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돈을 좋아하시는 어머님이 부잣집 딸을 며느리로 삼고 싶으셨는데

며느리감이라고 데려온 여자가 가난한 집에 딸만 있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셨다고 나중에 남편에게 어렵게 들은 이야기다.

 

세째인 시동생이 데리고 온 여자는 키가 작다고 싫어하셨다.

그러나 직장이 튼실하고 돈을 잘 버니 용돈 하나는 잘 주겠다 싶었는데

막상 결혼 시키고 보니 기대한 만큼의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깍쟁이니 얼마나 잘 살려고 그러는지 보자느니 며느리를 흠 잡더니

말이 씨가 되었는지 시동생과 동서가 한꺼번에 명퇴를 당하고

그 후 벌린 일이 계획대로 진전되지 않아 생활고를 겪었다.

 

결혼을 반대하고 미루시는 것을 눈치 챈 나는

남자에게 어머님 뜻대로 하라고 했다.

결혼만큼은 본인 뜻대로 하겠다며 처음으로 어머님과 맞선 남자를 따라

남자의 집을 찾아갔던 그날도 나는 남자의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적셔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결혼이란 것이 쉬운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렇게 수모를 받을만큼

내가 못났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는 것이 이유가 되다니 정말 슬펐다.

쫓겨나듯이 집을 나온 남자와 나는 송도 유원지의 불빛을 슬프도록 쳐다보다

마지막 버스를 놓쳐버렸다.

남자는 그렇게라도 잡아두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마지막 수단을 썼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떼어놓지 못할 인연을 만들었다.

 

그 후 남자는 독립을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제는 친정엄마가 반대를 하셨다.

성대하지는 못하겠지만 조촐하게라도 결혼식을 올리고 살림을 해야 한다는 것이

딸 가진 엄마의 마음인 것을 그것도 헤아리지 못하고

결국 둘이 집을 나와 그 이름도 불량해 보이는 '동거'란 것을 했다.

남편의 월급으로 살림을 하나 둘 장만해서 소꼽장난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느날 중년의 부인이 찾아왔다.

누구냐고 묻는 나와 엄마라고 답하는 부인.

그렇게 해서 나는 남편의 생모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세상에 남편의 엄마도 모르고 누구냐고 물어야 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힘들었겠지만 사춘기도 무난히 보내고 남자가 입대를 했다.

힘든 군대생활 중에 가끔 찾아오시는 동료들의 부모님을 보면 부러웠고

그럴때마다 엄마가 생각나곤 했겠지.

휴가를 나왔으나 친구들도 군대가고 집쪽으로는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고

날따라 감기 기운이 있는지 몸이 으슬거리더란다.

아픈 몸으로 찾아 간 곳이 엄마(생모)가 계신 곳이었다.

거기서 몸을 추스린 후 그 질긴 천륜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머님은 당시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 여성이었다.

나는 제목만 들었던 동화책도 남자는 다 읽었다고 했다.

삼형제 의복도 손주 지어 입혔는데 뜨게질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남자는 그곳이 탁아소라 했지만 맞벌이를 하시던 부모님은 삼형제를 유치원에

보내어서 그 시절 사진 중에 내가 제일 부러운 것이 남편의 유치원 졸업사진이다.

 

두살씩 터울진 삼형제 중에 형의 머리가 명석해서

명문 중고등학교에 다녔다.

같은 초등학교에 다닐때 형의 담임이 [아무개(형) 어머니 학교에 좀 오세요]하시면

어머니는 보자기를 들고 가셨고(상장과 트로피를 싸오기 위해)

[아무개 (남편) 어머니 학교에 좀 오세요]하시면 돈을 갖고 가야했다고 했다.

교실 유리창을 깼거나 친구들을 때려서 약값을 물어줘야 했기 때문이라 했다.

교복 단추하나 떨어져 입혀본적 없고,결석 한번 시키지 않아서

남편은 우등상은 못탔어도 개근상은 탔다고 했다.

극성스러우리만치 아이들에게 헌신하시던 어머니는 아버님과 가끔 다투시곤 했다.

술 좋아하시고 사람 좋아하시는 아버님과 교양있고 유식한 어머님은 썩 맞지 않으셨다.

남편의 흐트러진 모습 하나도 용납이 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러던 중,요즘 세상에도 특종감일수 있는 사건이 생겼으니

삼형제와 남편을 둔 사십초반의 유부녀와 명문대를 졸업한 열살 남짓 연하인 총각과의

로맨스가 그것이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쉽게 사그러 들지 않았는지 결국은 이혼이라는  멍에를 져야 했고

두 사람은 법이 정해준 죄값을 받고 부부가 되었다고 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서른다섯해가 더 지났다.

두 사람의 사이에 35살 난 딸이 하나 있으니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딸을 낳았고 딸이 태어난지 열달이 되던 해에

어머님은 마지못해 결혼식을 올려주셨다.

늦은 결혼이라 예단은 필요없다셨지만 엄마는 인사는 하겠다고 하셨다.

어머님은 돈으로 달라고 하셨다.

그날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엄마에게 무거운 한숨을 안겨 드렸음을 지금 말한다.

예단비라고 챙겨온 봉투를 보신 어머님은 봉투가 얇다는 이유로

거절하셨다.봉투를 더 채워서 한번 더 걸음하신 울엄마.

그때 무슨 심정으로 신발을 신으셨을지 돌아가는 걸음이 얼마나 무거우셨을지..

엄마의 빈 하늘에  검정 먹구름이 무겁게 덮혀 있었을테지.

갑자기 쏟아진 비를 맞은 기분보다 더 축축했을테지.

 

시어머님과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참 힘든 시집살이였다.

남편이 찾은 생모는 내게 참 자상하셨다.

그 엄마를 어머님이라고 부를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하고

 잠깐 바보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오래하지 않았다.

남편에겐 엄마지만 내게는 아버님과 계시는 그 분이 어머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생모와 그렇게 시작된 나와의 인연이 지금까지도 내겐 거미줄같은 어지럼증이었다.

세월이 갈수록 내게 잘해주셨다.

아이들 옷도 뜨게질 해서 부쳐주시고 잊을만 하면 찾아오시고

잊을만 하면 전화를 하셨는데 그때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명절이 되어도 그렇고 생신이 되어도 그렇고

내게는 이중부담이 되어 왔고 어쩌다 시작된 찾아 뵙기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 빈도를 극대화 시키려는듯 나를 찾아대셨다.

 

남편에게 딱 한 번 원망을 했다.

[내 엄마냐고..당신 엄만데 보고 싶으면 당신이나 찾아 뵙지

왜 나를 끌어 들여 이렇게 힘들게 하냐고..]

새어머니도 나를 힘들게 하시고 친어머니는 모질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 친절도 내겐 불편했다.

 

지금은 두 어머님 모두 칠순을 훌쩍 넘기셨다.

친어머님은 두번째 사랑과 지금까지 해로 하고 계시지만

시댁과의 관계가 소원하시다.

잘 가르쳐 놓은 멀쩡한 동생이 (형이) 뭐가 부족해서 유부녀와의 사랑 놀음에

코가 꿰어서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을 하시는가 보다.

그 시절에 대단한 이슈긴 하다.

지금 생각하면 삼십년이 넘도록 같이 살아준 그 아저씨도 대단하시고

그 나이에 사랑때문에 자식을 두고 갈 정도의 열정을 가진 어머님도 대단하시다.

 

엊그제는 어버이 날이자 새어머님 생신이어서 아버님 계신 시댁에 갔지만

우습게도 나는 어린이 날 남편의 친모를 만나 점심을 사드리고 왔다.

우리와는 무슨 인연이신지 가까이 살고 계신다.

무릎 수술후 거동이 왕성하지 못하시다.

아저씨는 우리를 무척 어려워 하신다.

어릴땐 몰랐고 어른이 된 지금 그들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독을 품을만도 하지만

오히려 어른이 되고 보니 그들을 이해를 한다기보다 이해를 해야 되지 않겠냐고

나는 말한다.여자로서의 행복을 누려야 될 이유였다고 억지로 이해해 보려한다.

 

여자로서의 파란만장한 삶을 산 두 어머님.

한 어머님은 사랑을 좆다 자식에게 버림받은 불행을 얻었고

(아주버님은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하셨고,

시동생은 친모는 마음속에만 담아둔 것 같은데

남편은 고래심줄같은 그 천륜을 버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낑낑거리며 질머지고 있으니..)

한 어머님은 평생에 자식 하나 낳아보지 못하고 남의 자식 키우느라

그 힘든 세월을 보냈건만 겉으로 보이는 그 모진 모습이 본 모습으로 각인되어

계모의 틀을 벗어 내지 못한 불행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여자로서의 삶은 두 분 다 슬픈 역사를 지니고 계시는 나의 두 어머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