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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아야 해


BY 모퉁이 2005-04-13

그녀 나이 열네살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했다.

오빠 둘에 남동생 하나 그리고 아버지의 바라지를 했다.

그러다 큰오빠 결혼하고 7년만에 올케와 사별을 했다.

남겨진 조카 둘을 엄마처럼 키웠다.

소풍때도 같이 가고 운동회도 함께 해서 엄마로 아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 나이 서른을 넘기고도 시집갈 생각을 않는다.

아니,마음이 없다기보다 결혼할 때가 아니라고 여겼다.

내가 가면 남은 조카는?홀로 계신 아버지는?

오빠가 먼저 재혼을 하는게 순서라 여겼다.

치매끼가 있던 아버지 돌연히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오빠에게도 연분이 나타나서 재혼을 하고

이제 그녀가 좋은 사람 만나 시집 가기를 주위에서 다들 원했다.

그녀의 오빠 말에 의하면 관광버스 한 대분과 맞선을 봤지만 누누히 실패라 했다.

서로 연분이 아닌 탓일거라 했다.

어느날 이웃 아주머니가 당신네 며느리감 소리에

불현듯 그녀가 생각나 내 생전 처음으로 중매쟁이가 되었다.

요즘 중매는 억지로 엮어주는게 아니고 그저 소개 정도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도 하지만 한번 본다고

다 맺어질 인연이라면 우리네 인연지기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첫눈에 반한 남자와 아니올시다 싶은 여자는 밀고 당기는 중이었다.

결혼을 억지춘향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주사위를 던져놓고 나온 숫자가 당첨이 되어야 하는데

맞지 않는다면 다음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

그런 두어달이 지난 후, 두 사람의 결혼소식이 들렸다.

그렇게 해서 나는 술 석잔을 얻어 마셨다.

그런데..아니 그런데..

결혼 하던 그해 가을 우리는 귀에도 생소한 IMF란 말을 듣는다.

남자는 건설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타격을 입은 업종 중에

하나가 건설경기였다.

살림은 나락으로 나락으로 마지막까지 떨어지고

겨우 장만했던 33평짜리 아파트에서 물러나 셋방을 얻어야 했고

포장마차라도 하겠다는 그녀의 각오와 남자의 용기로

과일 노점으로 나섰다.

서른두 살의 동갑내기 젊은 부부는 참 열심히도 살았지만

결혼만 하면 행복할 것 같았던 그녀에게는 시련이었다.

행복에 겨울 시간도 없이 현실의 굴레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아기마져 몇번의 유산을 경험하게 했다.

자칫하면 불임 될 가능도 있다고 했다.

받아먹은 석 잔의 술이 나를 정신없이 취하게 했다.

내 탓인것 같기도 해서 정말 보기 안타까웠다.

운명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사람마다 타고난 운명,즉 팔자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녀의 팔자는 정말 험난한 팔자다 싶었다.

어렵사리 임신이 되었고 열 달을 내내 누워 있어야 한다는데

고생하는 남편 생각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지라

누워있는다고 맘이 편할까 몸이 편할까.

그녀 마음 알기라도 한걸까.

무사히 딸을 낳았고,후유증없이 건강했다.고맙다,정말 고맙다.

오래 이웃하지 못했다.

내가 이사를 하면서 그녀 혼자 객지에 떼놓고 떠나는 에미 마음 같았다면

너무 호들갑스러울까만 그땐 그랬다.

나를 언니처럼 따르고 의지하던 그녀를 데려다 놓고는

내가 먼저 그녀를 떠나려 하니 맘이 편치 못했다.

그녀도 어른인데 이제 한 가정의 아내요,맏며느리요 에미로

잘 살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후 둘째를 낳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들이었다.100점이다.

사는게 뭔지..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을 믿고 싶었다.

서로 희미하게 지내다 보면 좋은 소식 들리리라 있으리라 했다.

엊그제 그녀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녀의 하나 있던 시누이가 결혼을 한다고 했다.

우연찮게 그녀의 시누이 결혼식장에서 그녀을 보게 되었다.

둘째 낳고 몸 풀러 온 오빠네서 보고 몇해만인가.

그때 한 이레 되었던 아들넘이 영락없이 그녀를 닮았고 네 살이라 했다.

어느새 마흔 줄을 앞세운 그녀 또한 둥글둥글한 웃음이 넉넉한

편안한 여인네가 되어 시누이 시집을 보내는데 큰몫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참 편해보였는데 그래 보였는데....

그녀의 새올케의 말에 의하면 고생이 심하다고 한다.

남편의 성격도 만만찮고,가진것 없는 살림도 그렇고

시동생의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인한 장애는 커다란 아픔이었다.

그녀의 시동생과 '안녕하세요?"하고 나눈 인사끝에 악수를 하려던 나는 흠칫했다.

오른손이 불구가 되어 있었다.

손가락에 몇개 없었고 그나마 힘없이 축 늘어져 마음대로 흔들거렸다.

5년여 사이 그녀 주변에 많은 사연이 늘어나 있었다.

그동안 쌓였던 빚은 어느정도 갚았으나 아직도 결재할 금액이 남았고

장사는 예전보다 더 어렵고,아이는 둘이나 태어났고, 홀 시어머니에

결혼하지 않은 시동생이 둘이 남았으니 그 몫도 크다.

잘 살기를 바랬는데 정말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가슴이 아려서 국수맛도 모른채 국물만 몇모금 마시고 일어섰다.

그래도 그 넉넉한 웃음만은 그대로여서 다행이었다.

두툼하고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면서

'언니!이제 안 내려오세요?나만 두고 가면 어떻해요.미워이~'한다.

뭐라 던져놓을 말이 없어서 그냥 말없이 웃었다.

언젠가 고생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길 바랠 뿐이다.

사람이 사는 일은 앞날을 모른다.

지금 그녀에게 닥친 시련들이 내일 비록 눈물로 읊조릴지라도

'그런날이 있었노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정말 잘 살아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