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을 끄집어 내어보면
마당은 운동장처럼 넓었고 기와가 놓인 지붕에 대청마루가 무척 높은 집에서 멜빵바지를 자주 입었고 엄마 손잡고 사진관에 갔던 날 펑~하는 소리와 번쩍거리는 빛에 놀라 엄마 눈도 내 눈도 동그랗게 놀란 눈이었던 것을 훗날 실금 비켜간 누렇게 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 찾을수 있었다.
나름대로 나의 유복한 시절은 그쯤의 기억에서 접히고 만다. 어느날 이삿짐을 쌌고 시커먼 루핑 지붕집으로 이사를 갔고 그 집에서 나는 심한 어지럼증도 각혈같은 코피도 흘려봤다. 보리밥이 목구멍에서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였다가 엄마의 젖은 손에 쥐어 박히기도 하였다. 나를 쥐어 박는 그 손끝이 탱자나무 가시박힘보다 더 아렸음을 안 것은 세월이 좀 더 흐른 뒤였다.
아버지는 새벽같이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가셨다. 겨울날 저녁은 일찍도 찾아와서 아버지는 컴컴한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셨다. 대문밖에서 아버지 자전거가 덜커덩 걸리는 소리가 나면 마루끝에 나가서서"아버지 오십니까~?"로 아버지를 맞았다. 어쩌다 자전거 뒤에는 사탕봉지가 매달려 있곤 해서 우리는 아버지보다 혹시나 싶은 사탕봉지를 더 기다렸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낡은 자전거는 그 당시 재산 1호 쯤 되었던 것 같다. 보물도 아니었으면서 아버지는 우리를 자전거 태우준 기억은 없다. 하루 세끼를 다 찾아 먹는 날이 있나하면 한 끼쯤 넘어가는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들 키는 잘 자라서 다음해가 되면 깡충해진 옷자락 때문에 나는 팔부나 칠부짜리 옷을 입어야 했는데 요즘 같으면 최신 유행이겠지만 그땐 빈곤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것 같아서 참 싫었다.
그렇게 해서 중학교에 갈 때가 되었다. 입학식을 하고 다음날 첫수업이 있던 날. 교복은 준비했으나 책가방을 미쳐 준비하지 못했던 나는 등교 첫날부터 아침이 우울했다. 어느 양장점 종이가방에 교과서를 넣어 들고 가야했다. 책이 무거워 종이 가방이 찢어질 듯 아슬했다. 간신히 등교는 했으나 자꾸 내 책가방에 꽂히는 시선들 때문에 그날 나는 수업을 어떻게 받았는지 모르겠다.
책가방을 사주지 못한 엄마 마음을 이해하긴 너무 어린 나이였을까. 엉엉 울며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엄마는 한숨만 내쉴 뿐 방법이 없는 모양이다. 싫었다,가난하다는 것이 정말 싫었다.
그날 저녁 아버지 손에는 사탕봉지보다 훨씬 큰 가방이 들려 있었다. 내 책가방이었다. 제때 준비해 주지 못해 미안해 하시는 아버지 마음을 읽기보다 나는 준비된 가방에만 정신을 쏟고 책을 챙겨 넣었다. 다음날 아버지는 더 이른 새벽에 집을 나가셨다. 그때까지도 나는 몰랐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자전거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내 책가방을 사오신 날부터 자전거를 타지 못하시고 이른 새벽에 나가셔서 늦은 저녁에야 돌아오셨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에야 아버지의 자전거가 마당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저당잡고서 내 가방을 사오셨던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전당포라는 간판을 쳐다보기가 싫어졌다.
아버지의 자전거는 아버지 유일한 소품 중에 하나였다. 아버지의 자전거가 마당에 세워져 있으면 든든했다. 손으로 자전거 패달을 돌려보기도 하고 비스듬히 세워진 자전거 안장에 올라타보려다 넘어뜨리기도 하고 그러다 아버지 몰래 끌고 나가 배운 자전거는 어른이 되어서 내 아이를 태우고 다닐 정도는 되었다.
환갑을 몇해 남기고 스물넷의 큰언니를 출가시키고 생전에 낳아보지도 길러보지도 못한 아들대신 외손주 둘을 보고서 환갑 지나 진갑 맞던 해 내 나이 스물둘, 막둥이가 겨우 열두살이었는데 하얀눈이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먼 소풍 떠나시더니 어느새 스물다섯 해가 되도록 돌아오지 못하신다. 지금은 자전거 대신 자가용으로 세상 구경 시켜드릴수도 있는데 아버지 지금 안 계시고 아버지의 자전거도 없지만 열네살 내 기억 속의 아버지 자전거는 내게 잊지 못할 가슴앓이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