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을 앞두고 오래된 전화번호들을 찾아냈다. 지역번호 앞세우고 꾹꾹 누지른 전화기 저쪽에서 '이 번호는 결번이오니..' 뭐하며 산다고 결번이란 대답을 들어야 했는지는 반성 않고 번호가 바뀌었다고 연락 제 때 주지 못한 친구만 애꿎다. 휴대전화번호도 생소함에 그간 세월이 적잖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다.
[설 잘 보내고 언제나 무병무탈하다가 언젠가 한번 봐야지?] 짧은 글을 한참 뚜벅뚜벅 찍어 보냈다. 내가 메세지를 잘 삼켜먹기에 부리나케 걸려올 답을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저녁 먹은 설겆이를 끝내도록 답이 없어 잘 못 전달되었나 의심까지 했다.
푸덕대며 세수를 하고 있는데 볼 일 급한 사람마냥 딸아이가 화장실 문을 다급하게 두들겨댄다. 전화가 왔단다.그러나 전화가 끊어졌다.한참 울렸단다.
까치설날에 나를 찾을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나를 찾았냐고 여쭐만큼 적극적인 성격도 못되는지라 정히 급하면 다시 하겠지 하고 기다리려다 혹시 내 수첩에 적힌 번호 중에 하날까 싶어 오래된 수첩을 뒤적거렸다.
낮에 메세지를 보낸 친구다. 내가 이러고도 친구라 할 수 있는지.. 어지간하면 휴대전화에 번호 입력해놓고 사는 디지털 시대에 나는 아직 아날로그 방식으로 살고 있었으니..
전화번호를 눌렀다. 오래전 카랑하던 목소리에 약간 중후함이 묻어있는 중년의 여인네가 다짜고짜 [가스나야~]로 반긴다.
집전화는 한 달 동안 안내를 했었다 한다. 그러면서 우리집 전화번호를 부르는데 지역번호가 다르다. 그렇지.내가 이사를 하였지.그러니까 몇 년이 지났다. 그 무심한 세월을 누구탓을 하리.
낮엔 일 하느라 전화에 신경을 못 썼고 한숨 돌리고 보니 메세지가 와 있어서 바로 전화를 했다고 했다. [요즘도 멜랑한 편지 잘 쓰냐?] [내가 무슨 멜랑한 편지를 썼냐?] [너 나한테 편지 자주 보냈잖어.] [내가 너한테 편지도 보냈었냐?] [야가 지금 무슨 소리하노.] 가물한 기억속에 결혼 후에도 가끔 편지로 내가 연락을 했었나 보다.
나는 말이다,니네 집에 갔던게 기억난다. 버스도 없는 시골길을 오밤중에 걸어서 갔었지. 사랑채에서는 할머니들이 앉아서 길삼 매는 것을 보았지. 사랑채 문지방은 왜 그렇게 높던지 그리고 천정은 왜 그렇게 낮던지..그날 내 머리 혹 생긴거 아냐?
엄마는 잘 계시냐? 같은 양장점에서 맞춘 투피스 입고 찍은 사진 아직 갖고 있냐? 그때 우리 가방도 같은거 매지 않았냐? 우리 아들 군대갔다. 딸년은 올해 졸업반이다. 시집 보낼 일만 남았다. 벌써 할매 될 일 생각하니 아이구 징그러버라.
하하호호깔깔키드득~ 세수하고 로숀을 바르지 않은 얼굴이 당겨서 주름이 아마 더 패였을 것이다. 여자들은 참 말도 많다는 듯이 남자가 쳐다보았다. 발로 방문을 밀어닫고 오래 묵었던 기억 몇가지를 더 꺼내들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엔 분홍빛 복사꽃이 핀 양 밝으레 달아올라 있었고 앨범 속에는 스물셋의 봄날이 아롱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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