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만 다섯을 둔 엄마는 명절날이 오히려 적막강산이다. 다섯이나 되는 딸들이 모두 시댁으로 명절 쇠러 가거나 몇은 친정까지 멀리 떨어져 살고 있으니 명절날 엄마 찾아 뵙기가 쉽지가 않다. 다행이 친정 근처에 두 동생과 언니가 살고 있어서 명절 다음날 저녁이면 세명의 딸과 세명의 사위에서 태어난 여섯명의 손주들이 모이기는 해도 그래도 엄마에게 명절은 우울하신가 보다. 음식을 해놓고 장조카인 사촌 오빠가 아버지 차례를 모셔줄때 까지 기다려야 하고 사촌 오빠 역시 큰아버지 차례를 지내야만 숙부인 아버지 차례를 지내러 오시게 된다. 그런 세월이 익숙해 질만도 할텐데도 나이 들어가니 엄마는 아들 없는게 자꾸 서러워지는 모양이다. 혼자 계시는 모습을 보면 아들이 있었으면 저렇게 사실까..싶기도 하다만 딸이 다섯이나 되어도 혼자 계신 엄마를 모시지 못함에 서로 죄송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맏이라서 책임을 져야하고 동생이라서 책임을 면하고 싶지는 않다. 엄마는 어느 딸네 집에서도 함께 살기를 거부하신다. 사위보기를 아직도 어려워 하는 엄마 성격에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이웃과의 정이 어쩌면 자식보다 가깝다고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남의 동네에 가서 새로 정붙이고 안면 익히며 살기에 용기도 안나고 자신이 없으신지도 모르겠다. 그냥 동네 할머니들과 어울리며 지내는게 더 편하다고 하시는 말씀을 우리가 너무 곧이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자식은 부모 마음을 너무 모르고 산다. 설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면 엄마 생신이다. 다른 날은 몰라도 엄마 생신날 만큼은 우리 형제 다 찾아뵙기로 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야 하는수 없지만 되도록이면 다 모이는 방법을 모색하기를 엄마 집에서 생신을 차리게 된다면 그 일을 엄마가 도맡아 하게 됨은 뻔한 일이다. 멀리 있는 딸들이 와서 직접 음식을 하게끔 일은 놔두고 기다릴 엄마 성격도 아니거니와 아무래도 엄마 살림(?)이다 보니 엄마 손이 빠르다고 그러시는 분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다섯 딸이 돌아가며 엄마 생신을 차리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형제들 집에도 가보게 되고 엄마는 딸네집 구석구석을 볼 수도 있게 되고 엄마는 일손도 덜고,여러가지 효과를 보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해서 다섯딸 집을 한 바뀌씩 돌았는데 서울,청주,부산,대구,진해 그때는 이렇게 살았기에 그렇게 유람을 했었다. 그리고 다시 한바퀴를 더 도는 순번이 돌아왔는데 이번이 세번째 순서인 우리집 차례다. 그러니까 여덟번째 돌아가는 길이 되는 것인데 이번 서울행은 엄마가 힘들어 못 오시겠단다. 관절도 심하고 대여섯시간을 차를 타고 다니기에 버겁고 힘들어 다녀오고 나면 몇일을 몸살을 앓게 되신단다. 엄마 생신에 엄마를 피곤하게 하면 안되겠지 싶어서 의논 끝에 작은 언니한테 부탁을 하여 경비는 내가 댈테니 준비를 해달라고 했다. 흔쾌히 언니가 승락을 했고 다음주면 엄마를 보러 간다. 딸만 있는 우리 집은 명절은 썰렁하고 아버지 기일이나 엄마 생신날이 북적댄다. 그나마도 엄마 살아 생전이니 가능한 일일까 싶어 지레 아쉬움이 생기기도 하지만 어쨌든 남은 형제들의 우애만은 오래토록 변치 말기를 빌어 소원해 본다. 부모와 자식은 잘나고 잘사는게 자랑이 아니다. 아무리 못나고 험한 부모라도 천륜이기에 져버릴수 없는 것이다. 남이 보면 보잘것 없는 부모요 자식같아도 내게 있어서는 어느 잘난 부모 자식과도 바꿀수 없는 것이다. 한 때는 부모님 원망도 있었다. 남들처럼 악착같이 끝까지 뒷바라지 못해준 것에 대한 원망으로 미운 마음도 가져 보았었는데 돌아보면 부질없는 짓이었음에 눈시울이 붉어질 때가 있었다. 살아보니 내 자식에게도 내가 풍족하게 못해주는 마음을 에미가 되어보니 알게 되던 것을..그땐 내가 철이 없고 너무 몰랐어. 설날 아침에 드린 인사에서도 엄마는 [내 생일에 올거제?]이게 인사인 것을 보면 엄마는 명절보다 생신이 더 좋으신게다. 딸만 둘을 둔 나도 엄마처럼 그렇게 되지 않을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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