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자는 남자를 따라갔을 때에 그때 예비시엄니는 동네어른들 몇 분을 이미 심사위원으로 모셔놓은 상태였었다. 물을 떠오너라는 심부름을 두어번 시켰었고,나는 물받침에 컵을 올려 쟁반에 담아 들고 갔었는데 채점결과는 좋은 편이었었다. 그러나 후담으로 보면 배경이 좋지 않아 나는 며느리감으로 탈락위기에 있었으나 이 남자의 끈질긴 설득과 협박으로 결국은 둘이 이겨 독립을 하게 되었지만 그 여파가 얼마나 길고 질긴지 20년을 끌고 다녔다.
집을 사주지는 못하지만 전세는 얻어주겠다던 약속은 그런적 없다로 돌아서고 숟가락 하나 준비해준 것 없이 둘은 맨 몸으로 살림을 일구기 시작하였지만 며느리 보기 싫어 그런지 아들네 집이라고 한번도 다니러 오시지 않으시던 어머니. 결혼하면서 드리기 시작한 아버님 용돈은 지금까지 한 달을 거르지 않고 있지만 당연지사 할 일이어서 그것으로 나는 위안이나 안도를 받을 수 없는 몸이었다. 애당초 그러자고 한 일도 아니었지만 받는 돈은 적으나 보내는 돈은 많다면 많다.
어떤 해는 무엇이 그리도 맘에 들지 않은지 명절에도 오지마라했었고 그럼에도 다니러 간 길 대문앞에서 돌려보내기도 하였지만 내 무슨 청승이요 열부라고 내리는 빗속을 두번 걸음하여 겨우 대문까지 들어갔으나 이내 쫓겨나는 신세 면치못하고 돌아서야 하기를 몇번이나 했던지. 이유나 알자고 물음 한번 던지지도 못하고 죽으라면 죽지는 못할망정 죽는 시늉까지는 하였으나 그냥 죽어버리기를 원하셨는지 그것도 통하지 않았으니 내 무슨 부귀나 누리는 살림이라고 내팽개치지도 못한채 그저 다둑거리는 손길을 가슴에 묻고 엉엉 울어버린 20년.
중간에 선 남자가 힘들기도 하였겠지만 그래도 돌아서면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 마음을 토해낼 땐 내 잘못 같아서 아무말 하지 못했었다. 내가 현명하지 못하여 이 남자까지 힘들게 하나 싶었었다.
빈 손으로 나온지 7년 만에 조그만 집을 하나 장만했다. 처음으로 어머니 내 집에서 2박 3일 머무시면서 그 자존심 높은 양반이 내게 나직히 말씀하셨다."네게 미안하다.."라고... 눈물이 날만치 고마워야 당연했을까.그런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괜시리 겁이 났었다.왜 이러시는지,,차라리 또 뭐라 혼내셔야 정상일텐데.. 이런 복잡한 마음을 가져야 되는 내가 정상이 아닌지 몰라. 돌아가시는 길에 쥐어드린 약간의 용돈이 당분간 힘을 발휘하여 몇년을 편히 지냈다. 폭풍전야라는 말을 나는 많이 실감했다. 평온한,너무도 평온한 가운데 터지는 불기둥같은 폭발을 나는 주체할 수 조차 없었다. 평소에 괜찮던 사소한 일들도 어머니의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그 여파는 몇달에서 몇년이 가는 것이다. 한번 뒤집히기는 쉬우나 되돌리기는 너무도 어려웠다. 그런 세월이 흘러서 20년인데....
지난 봄에 아버님 위독설로 급하게 시댁에 내려갔었다. 상을 치룰 마음의 준비까지 하였으니 급하긴 급하였다. 그러나 목숨은 하느님이 부르기 전까지 마음대로 못하나 보다. 응급실에서 12시간,24시간 하던 것이 중환자실로 옮기고 다시 몇일, 그리곤 다시 일반병실로 옮기시더니 퇴원하셨다.
자식들이 셋이 있건만 모두 제 살기 바쁜 40대 가장이고 딱히 두 어른을 모실 형편이 아니라는거 무엇보다 어른들이 더 잘 아신다. 쉰을 보는 큰아들 내외 맞벌이 한다고 하나 연연생인 대학생이 있고 나역시 대학에 고등학생이 딸리다 보니 변변키는 마찬가지이고 막내아들,명퇴이후 이일 저일 전전긍긍한다는거 아시지만 아들이란 이름으로 병원비며 간병인까지 모두 맡아야 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또 문제가 되었다. 병원비와 간병비가 제법 나왔었는데 선뜻 나서는 형제가 없는 것이다. 당시 형편을 이유로 우선 내가 맡기로 하고 퇴원시 500만원 가량되는 돈을 카드로 해결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후에 어머니는 또 다른 약값이랑 병원비를 보태라고 전화를 하셨다. 다른 아들에게는 말씀을 드렸나는 모르겠지만 나는 당장 해결해 드릴 여력이 못되어서 노력을 해보마고 하였으나 감당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상하시다.형편이 아니 되시는것도 아니면서 어째 이리 자식들한테만 모두 보상받으려 하시는지..있는 돈으로 쓰시면 될텐데,그렇다고 그 돈 자식 줄 리 만무하지만 자식들 모두 받을 생각들도 하지 않은데 말이다.
혼자 삭일까 하다 형님과 아랫동서에게 하소연하였다. 이런 일로 전화해보긴 처음이지 싶었다. 형님은 할 말 없다며 침묵이시고 아랫동서는 어머니께 말씀 드려 이번 병원비도 모두 해결하다 보니 형편이 못된다고 말씀 드리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할 말이 아닌것 같아서 다시 형님께 부탁했다. 생색내는거 같아 미안했지만 내 형편도 딱하다는 것을 알려야했었다.
형님이 말씀을 드렸는지는 모르겠다.이런저런 연락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부탁한 돈을 보내드리지 않았는데도 어머님이 다시 뭐라하시지를 않는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전에 없이 안부전화를 미리 하신다. 별일 없냐?애들 학교 잘 다니냐?
전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이때까지 이런 일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이것도 폭풍전야의 고요함일까. 아니다.이젠 아닌것 같다.
20년을 한결같이 대했었던 나였다. 아무리 나에게 불호령을 던지고 모진 소리 퍼부어도 내가 감당할 몫이라 생각하고 착하게도 보기싫다시면 보여주지 않았고,오지 마라면 가지않았다. 사실은 이것이 나의 반항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해야 될 일은 변하지 않고 마음을 보여 드렸었다.
결국은 그 마음이 어머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일까. 예전에는 안부전화라도 한 번 할라치면 가슴 뛰는 소리가 먼저 달려갔었는데 요즘은 능글스럽게도 쭈그리고 앉아서도 잘 건다. "어디 갔었더랬어요?집에 좀 기시지..바람부는데 날아갈거 없나 잘 살피세요. 가을 바지 있으세요?백화점 물건은 못 사드리고 동대문 가면 하나 건져볼께요." 딸이 없어서 며느리가 아니면 이런 호사(?)도 못 받을거라는거 안다.
옷을 사다 드려도 맘에 차지 않는다며 누굴 줘 버리는지 입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이젠 비싼 옷은 아니지만 가끔 바지라도 하나 사서 보내드리면 맘에 든다고 하신다. 첨에야 뭐하러 사 보냈냐 시지만 나중엔 다음에 살땐 이런색 사라고 주문도 하신다.
많이 서운하고 억울하기 까지 했었던 시어머니와의 갈등때문에 힘들었던 지난세월. 세상의 시어머니가 다 그러신건 아니겠지만 유난히 유별나신 시어머니때문에 오죽하면 세 아들이 한결같이 그럴까. '엄마는 연구대상이야..'
마흔중반에 들어서서 친구네 아들들 군대가고 제대하고 내 딸들 자라서 20대 숙녀되니 남의 집 사람 되기는 시간문제이고 이렇듯 마음을 되돌려 놓는 것은 결국은 세월이었다. 세월이 약이겠지요~라던 대중가요 가사를 빌리지 않아도 세월은 어떤 감정도 삭히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약이기도 하지만 어머님이 변했다기 보다 어쩌면 내가 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제 어머님 세대로 천천히 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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