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직원들이랑 점심을 먹으러 나서는데 전화가 왔다.
바로 밑의 여동생이다.
-언니너? 나야..
목소리 끝을 맺지 못하는 걸 보니
내리는 비를 연유한다해도 평소 동생의 목소리완 판이함이 여실하다.
무슨 일일까. 머리속에 바쁘게 엉긴다.
외양으로 보나 마음씀씀이를 보나 어디서나 동생이 언니같다고들 한다.
한눈에 보여지는 것이 다는 아니라고들 하지만
실지 내 동생은 맏딸로서 내가 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티내지 않고 묵묵히 채워주는 속깊고 따스한 사람이다.
그런 동생이 말끝까지 늘일땐 필시 곡절이 있지 싶다.
-무슨 일이야? 왜~애
안그래도 이런 저런 집안 일로 지쳐있던 나는
반가움보단 와락 신경줄이 곤두선다.
-있지, 언니..없어 한개도 읎서
-그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너 좀 내가 알아듣게 말을 해봐좀
-아, 앵두남구..울타리, 읎어 마커 우데로 갔는지 한개도 읎이 싹 뽑어가삐래서..흑
결국엔 말끝에 울음이 묻어난다.
후.두.둑....내 가슴 저 깊은 골짜기로 빨간 앵두가 마구 떨어져 내린다.
아아, 그렇구나.
지금이 앵두가 흐드러질 때이구나
술병 가득가득 빨간 열망을 풀어낼 때구나..
아버지의 유년에서부터 시작해
내가 시집을 오고도 매년 고향이란 이름으로 한 곳에 존재하던 곳.
그 시골집은 작년 아버지의 잦은 병원행으로 인해 형제들이 의논해서
가을 쯤 병원 가까운 근처에 아파트를 사는 것으로 폐가가 되었다.
언제든 다시 찾아와 소일거리를 찾으리라는 다짐으로
터를 다 팔아넘기면서도 집터만큼은 고수했었는데
더 이상 사람의 온기가 살지 않는 집은
저 혼자 산같은 풀더미를 안고 안간힘을 쓰다
스스로 생명의 끈을 놓아버렸을테고..
곱게 빗질한 마당에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면
뽀얀 낯빛으로 뒹굴던 땡글땡글한 감나무 그림자
여름을 가로질러 포슬포슬 까실까실 하얗게 말라가던 빨래들.
가끔 덜 마른 빨래를 뒤집어 너는 엄마를 향해
비스듬히 누운 바지랑대를 폴짝 거리고 뛰어넘으며
살포시 쥔 손안에서 한 알 한 알 아껴서 꺼내 먹던 앵두알.
말갛게 잘 익은 앵두알은 아무리 조심해도 잘 터져버렸다.
해서 앵두를 딸 때는 아기 다루듯 살살 다루어야 했다. 때문에
투박한 어른들의 손보다는 아이들의 잰 손이 훨씬 따기 수월했다.
이른 새벽부터 엄마를 도와 채 가시지 않은 안개를 동무삼아
양재기를 들고 나무가지 아래 바치듯이 앵두를 따 모았다.
한 양재기 그득 차면 그 옆에 커다란 양철 다라이에 조심스레 갖다 붓고
촐랑거리면서 앵두나무로 뛰어가 숨 한 번 크게 몰아쉬고 또 따고..
옆에서 부지런히 따고 있는 엄마 한 번 쳐다보고
그러다 엄마의 은근한 눈길 한 번 잡으면
가슴속에서 앵두알같은 행복한 비명이 톡톡 터졌다.
키가 크고 가지가 실한 앵두 나무를 어림잡아 10여 그루쯤 훑으면
잘생긴 봉분처럼 다라이가 수북히 차고 엄마의 입이 함지박처럼 벙글어졌다.
-아구야, 오늘 지냑엔 내 새끼들 입구녁에 단물도 집어넣겠잖너
하루종일 시장에 나앉아 작은 종지에 담아 팔던
시골 아낙네들의 요긴한 가용수단이기도 했던 그 앵두가
유난히 우리마을엔 집집마다 울타리로 넘쳐나
먹을 것 입을 것 다 귀한 산골마을에 음력단오를 기점으로
아이들의 입도 마음도 호사를 누리곤 했었는데..
친정과 멀다는 핑계로 늘 뒷전에 물러나 있는 나완 달리
동생은 못난 언니 몫까지 대신 챙기며 부지런히 친정을 오간다.
이번에도 말도 없이 살째기 강릉행을 했었나 보다.
-사실은 있잖아 언니야, 강릉에 가도 예전처름 마음이 부풀지를 않어
-그래, 시골 냄새하고 딱딱헌 도시냄새하고 어찌 같긋나
-있잖너, 우리 아덜도 예전의 할머니할아버지 집이 더 좋대..
신발에 흙묻혀가민서 밭이며 산이며 신작로를 멍멍이랑 치뛰고 내리뛰고
하던 얘그만 자꾸해
그리웠으리라.
그래서 슬쩍 옛집에 들렀으리라.
어쩌면 몇 줌 지나온 세월이라도 훑어
한 병 술이나 담글까 싶은 마음에서였으리라.
주인이 없는 집의 핏빛 울음을 누군가 미리 염려했을까.
흔적도 없이 뿌리째 없어진 그 많던 앵두 나무들.
덩그마니 두덩만 남은 자리에서
존재의 뿌리를 송두리째 도둑맞은 충격에 망연했을 동생.
그대로 박제가 된 기분이더라는 말이
점심을 먹는 와중에도 숟가락 위를 둥둥 떠다녔다.
헛헛하고 씁쓸한 마음이
자꾸 헛손질을 하다
결국은 국물을 엎질러 버렸다.
나이를 헛먹었다는 농을 뒤로 받으며
먼저 일어서겠다는 인사도 못하고 허둥허둥 나왔다.
내 마음의 자궁을 들어낸 것 같은 날,
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