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컵을 들어 호박 다린물을 한 모금 삼킨다.
어, 뜨거!
너무 데웠나, 목이 뜨끔하다.
요즘따라 자꾸 손이며 발, 얼굴이 부어 지인의 권유로
호박에 대추, 도라지, 옥수수 수염, 꿀 등을 첨가해서 다린 물을
열심히 먹긴 하는데 삼킬 때마다 비위가 상해 곤욕스럽다.
빠듯한 살림에 내 몸을 위해 돈을 투자한다는 건 사치겠지만
건강 잃으면 다 무슨 소용이냐는 지인의 면박에 그래, 까짓 거 싶어
두 눈 딱 감고 처음으로 나를 위해 약?이란 걸 지었다.
정말이지 돈이 무섭긴 무섭다. 당장 효과가 나타난다.
그러니 일단은 열심히 먹고 봐야지.
알맞게 식은 종이컵을 단숨에 비워내는데
가슴 저 밑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 하나.
설 밑을 앞둔 이즈음이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사연이다.
어렸을 적 엄마는 꼭 설 명절 보름쯤 전에 집에서 조청을 고으셨다.
그 조청으로 과즐(유과)도 만들고 길다란 가래떡도 찍어 먹고
한자루 그득 튀겨온 옥수수를 공처럼 둥그렇게 만들어 간식으로 먹기도 했다.
조청을 고으려 아궁이 앞에 앉아 하루를 보내던 어머니.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엄마의 부지깽이가 도란도란 일러주는
숱한 얘기들을 듣는 일은 참으로 슬프고도 행복했다.
시골 아낙 답지 않은 엄마의 긴 속눈썹이 일렁이는 불길 속에
몇 번이나 젖었다 말라가고
뜨거움에 무릎걸음으로 아궁이에서 물러났다 다가앉기를 반복하면서
내 옷섶이 덩달아 콧물을 찍어내며
살아보지 못한 시간들을 더듬기도, 거닐기도 하던 시간.
지금에야 그런 일이 없겠지만
옛날에는 가난한 살림 입 하나 덜자고 땅 몇 마지기와 맞바꿔
어린 딸을 시집보내는 일이 많았단다.
울며울며 부모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딸을 보내놓고
가슴은 얼마나 찢어졌을까.
그렇게 시집간 딸이
매서운 시집살이를 견디며 몇 년이 지났단다.
구정을 얼마 앞두고 조청을 고으라 명하고 마실 간 시어머니.
어린 며느리 혼자 조청을 고으며
아궁이에 가만히 앉아 일렁이는 불길을 바라보자니
떠나올 때 산마루까지 누나~ 누나~ 울며 따라나서던,
서러운 경황에도 유난히 눈에 밟히던 동생 생각에 괜한 부지깽이만 적시고 있었단다.
갑자기 누나~ 소리에 환청을 들었나 싶었는데
딸의 소식이 너무너무 궁금했던 친정 부모님이
동생 편에 떡 몇 되를 들려 누나의 안부를 들여다 보고 오랬단다.
꿈인가 생신가 부엌에서 부등켜 안은 두 오누이.
오랫만에 보는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훌쩍 지나버린 몇 년을
눈물로 들춰보고 덮고..또 들추고..
한참을 얘기하다 보니 아직 저녁은 이르고
그제서야 먼 길을 걸어왔을 동생이 점심도 걸렀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란다.
남은 밥은 한 술도 없고 어쩌나..
괜찮다는 동생에게 집에서 가져온 떡을 살째기 한 개만
어여, 얼른 먹어..물 한 대접이랑 먹이자
음식 기별을 맞본 속이 오히려 빈 속보다 더 요란스럽더라고.
한창 자라는 아이들의 식성이야 더 말해 무엇하리.
이제 거의 다 되어가는 조청 냄새가 동생의 눈을 고정시켰으리라.
누나는 그런 동생에게 가마솥 가장자리를 숟가락으로 휘 긁어
주먹만한 덩어리를 감아 올려 맛을 보라고 주었단다.
하루 종일 가마솥에서 달고 졸아야 만들어 지는 조청,
얼마나 뜨거웠을까.
맛있다는 생각이 입보다도 먼저 맛을 보고
한참 식어야 혓바닥 데이며 먹을 수 있는 게
가마솥에 들어있는 조청이었을 테고.
침을 흘려가며 혀로 숟가락 끝만 핥는 동생이지만
잘 자라서 자신을 보러 달려와 준 동생이
누나는 그저 이쁘고, 대견스럽고, 고맙기만 했다고.
갑자기 밖에서 부산한 발자욱 소리.
어딜 가나 유난히 티를 내는 시어머님의 목소리가
삽짝 문을 들어섰겠다.
놀란 누이, 혹여 책잡힐까 동생의 숟가락으로 눈이 가고
어여, 빨리 먹어..어여 빨리 먹어..
누나의 다급한 표정에 마음이 급해진 동생은
단숨에 숟가락에 있는 그 주먹만한 조청 덩어리를 꿀꺽.
시어머님이 부엌으로 들어오는 것과
동생이 장뜀을 펄쩍 펄쩍 뛰며 부엌 바닥을 구르는 것이 동시였다고.
어이없게도, 너무나 허망하게도 동생은 그렇게
누이의 가슴 속 뜨거운 하늘이 되었단다.
식도가 녹아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이
그 조청에 들어있을 줄이야!
급할 수록
궁지에 물릴 수록
사람은 침착해야 하고,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모녀의 눈물 콧물 속에 은연중에 자리하던 삶의 깨우침.
그랬다.
엄마는 부엌 아궁이 앞에서
평생을 그렇게 조근조근 부지깽이 철학으로 들춰내 주셨다.
더해서 더 없이 간절하던 삶에 대한 엄마의 뜨거운 열정까지도.
내 삶의 뜨거움은 어느정도의 온도를 가지고 있을까.
시간에 매여
당연히 지니고 있어야 할 온기를 잃고 살았던 건 아닐까.
이젠 비어 버린 종이컵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리며 그 속을 오래 들여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