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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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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우화


BY 최지인 2006-01-11

 

사무실을 나와 우체국으로 가는 길 중간 쯤에는
길가에 면한 재활용품수집처가 있다.
그 수집처 양쪽 입구에는 내 허리높이만한 화단이 있는데
‘재활용’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떤 선입관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겨울을 제외하곤 늘상 꽃을 피워올리는 갖가지 화초들로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곳이기도 하다.
하여, 오가며 눈길을 주던 습관은 겨울인 지금도
무의식중에 그쪽으로 향한 시선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려 하는 것일 테고.

복돌이와 복순이.
화단 양지, 꽃 진 자리에 길게 누워
느긋하게 햇살바라기를 하고 있는 두 마리의 개이름이다.
추울 때는 난방이 되지 않는 실내보다는
햇살 비치는 바깥이 더 따듯한 법이라더니
태생적으로 타고 난 두꺼운 털옷도 한 몫 하겠지만
지나는 사람들의 수많은 눈길 따윈 이미 예전에 초월한 듯
양쪽 화단 하나씩을 차지하고서는 눈마저 지긋이 감고 있다.
저 편안한 표정이라니!
동안거에 든 스님의 묵언정진이 저렇듯 초연할까.
하긴, 풀꽃들의 뿌리를 방석으로 깔고 앉았으니
생명에 대한 질긴 소생력만큼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부터 길렀던 개는 아니라고 했다.
몇 년 전 거리를 떠돌던 개 한마리가
산처럼 쌓아올린 박스더미 구석에 새끼를 낳고는 죽어버렸단다.
어미의 젖냄새도 맡지 못한 새끼들은
몇 마리는 어미 냄새를 찾아 울다지쳐 생을 버렸고
겨우 남은 두 마리는 재활용품을 모아 생계를 잇는 사람들의
드나드는 정성으로 이젠 터 지킴이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저기 흩어진 쓰레기를 입으로 물어다
제법 정리할 줄도 알 정도로 영특한 두 마리의 성견은
이 근방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인된 존재이기도 하다고.
더 좋은 환경, 더 좋은 조건을 향해
오늘의 은혜따위야 가볍게 배반하는 사람들에게
‘답게 산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없이 보여주는 듯하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살고 있는 환경만큼은
현재의 입성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법이지만
단 하나, 정신의 무게에 대해서만은
타인이 손댈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 있는가 보다.
비록 때에 절어 원래의 몸색깔은 희미해졌지만
오며 가며 대하게 되는 형형한 눈빛만큼은
그 어떤 세월과도 무관하게 살아있음을 본다.

주 목적인 우체국 볼일보다는 그 두마리의 개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한 목적이었던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앞을 향해 걸으면서도 몇 번인가 뒤돌아보는
내 정신 속의 길을 어느새 알아챈 걸까. 갑자기 반짝 눈을 뜬 복돌이와 복순이가
고개를 길게 빼고 내 뒤를 오래 배웅해 준다.
그 눈길이 따뜻하다.
나도 모르게 살폿, 웃음이 난다.
누군가에게 나도 저렇게 따뜻한 배웅을 해주는 사람이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선 자리에서 한 바퀴 휘- 돌아본다

오버자락에 묻었던 바람이 와르르 떨어져 나가며
길 위에 동그랗게 모여앉아 재잘거리던 햇살들을 사방으로 흩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