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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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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BY 최지인 2005-09-12

       

 한가위 명절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민족의 대 이동을 앞두고 찾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마음이 설레기는 매일반이다. 고향! 힘겨운 삶에 버둥거리다가도 돌아갈 곳이 있음에 용기를 얻고 그쪽 하늘 향해 괜시리 시큼해지는 눈시울 몇 번 씀벅거리고 나면 금세 가슴 가득 따스한 온기로 메워지는 그 무엇이다. 고향이 '그리움'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사람들 마음의 언저리를 차지하고 있음은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확신이자 가족적 정서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리라.

 

 명절의 분위기를 반영이나 하듯 시장이나 백화점, 대형 할인매장엔 사람들로 넘쳐나고 매일 배달되는 신문마다 선물 광고 전단이 수 십장씩 끼워져 있다. 비싼 물가에 더해 얼어붙은 경기는 서민의 가난한 주머니를 더욱 서럽게 한다. 그럼에도 눈길은 가정경제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필요한 물품을 고르기 위해 바삐 전단지를 훑게 된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지. <제수용품 주문 받음>이란 글자 옆에 제사 나물이 g당 기준으로 세 가지에 얼마, 다섯 가지에 얼마 하는 문구에 한술 더 떠서 생선도 가격대가 각각 정해져 색깔도 화려하게 박혀 있다. 남들이 우스갯소리로 요즘엔 제사상도 주문해서 간단히 차례만 모시고 각기 여행이나 제 갈 길로 흩어지는 사람들이 많다더라 하는 소리를 해도 세상에 말이 그렇지 설마..그럴 리가..했었다. 하지만 광고전단지에서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하고 보니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이러다 제사를 대신 지내주는 대행사마저 성행하지 않을까 싶어 두렵기까지 하다.
 

 신문이나 방송 보도를 보니 이번 귀향은 많은 사람들이 포기할 생각이란 기사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가 지체되는 장거리 운전에 피로만 쌓여서, 경제적인 문제로, 명절 일하기가 힘들어서, 여행을 가기 위해서 등등 갖가지 자기 합리적 변명이다. 하나 하나의 이유는 다르지만 분명 공통된 한가지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이 먼저라는 사실이다.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의 미덕을 자랑으로 삼고 살아왔던 우리다. 명절이면 집안 어른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건강을 빌어드리고 덕담을 선물로 건네 받던 우리였다. 서러운 일, 속상한 일, 가슴 아픈 일은 '가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감싸고 덜어주었고 기쁜 일은 배로 늘려서 기뻐하고 축하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었다.
 
 주머니가 얇아져서 고향 집 찾아갈 때, 양손에 들고 갈 선물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들 어떠리. 하마 명절 한참 전부터 동구 밖 굽은 길을 내다보며 자식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우리네 부모님들의 애타는 목마름이 어디 그 선물의 경중에 관심이나 있을까. 오로지 자식 얼굴 한번 더 쓰다듬고 싶어 행여나 거친 손 자식얼굴에 흠집이라도 낼까 아까워 고이 모셔만 두었던 딸네가 사주고 간 화장품을 미련 없이 듬뿍듬뿍 바르고 주무시는 우리의 어머니들이 계시지 아니한가. 그 숭고하리 만치 간절하고 엄숙한 기다림의 행위 앞에선 누구나 가슴 뭉클한 본능의 눈물이 먼저 달려가는 무엇이다.
 

 제사 음식을 준비함에 있어 이른 새벽 우물에 비친 달빛을 길어 장독대 위에 놓고 먼저 정갈한 몸가짐으로 가족의 안위와 조상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심던 우리네 어머님들. 일일이 다듬는 나물 하나 하나, 음식을 장만하는 손길 곳곳에 닿던 어머님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요즘엔 그 마음가짐이나 정성이 많이 반감된 것 같아 심히 염려스럽다.
 

 당신 늙는 건 생각 않으시고 못 보던 새 자식 머리에 내려앉은 세월에 가슴이 철렁하고
당신은 속이 아파 죽으로 끼니를 때워도 당신이 해주신 밥 옛날 맛 그대로라며 미어져라 밥숟가락 입으로 퍼 넣는 중년의 아들 모습에 밥 안 드셔도 배부르다는 어머니. 마누라와 애들은 아빠 배 나온다며 그만 먹으라 핀잔하고 눈치를 주어도 그 옛날 없어서 배 곪게 했던 생각에 끝없이 옆에서 거들어 주시는 어머님의 푸근함.
" 어여, 어여 더 먹어라. 먹고 싶은 것도 다 때가 있니라..뭐니뭐니 해도 남자는 나이 들면 배가 두루뭉실 조금은 나와야 보기 좋더라".
하시며 흐뭇한 웃음 지으시는 우리의 영원한 고향, 어머니가 계신 곳. 바로 명절이 있기에 일년에 한 두 번이라도 찾아갈 명분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살다가 가끔씩 주저앉고 싶을 때, 가만히 눈을 감아 보자. 아주 먼 시간으로부터 느리되 분명하게 다가오는 따스한 힘을 느낄 수 있다. 바로 고향이다. 요즘의 우리는 뿌리는 존재하되 진정 정착하지 못한 떠도는 나무는 아닌지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